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뮐하우젠: 뮌처 vs.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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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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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뮌처그림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루터의 도시를 가다(19)

뮌처는 활동 초기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뮌처는 루터를 오해했다. 루터가 강조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였다. 루터에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군사로 복음에 따라 살아가는 자였다. 그러기에 자유를 누려도 사랑이 전제되었다.
반면 뮌처가 생각한 자유는 사랑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귀족에 대한 증오로 불타오르는 농민들의 행동은 방종에 가까웠다. 관용, 용서, 화해 같은 것은 뮌처 사전에 없었다. 루터는 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칼’에 대해 신중했다.
로마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4) 귀족의 칼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사용될 때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도구였다. 하지만 뮌처는 칼을 왜곡하므로 폭력으로 돌변하게 했다. 농민의 손에 쥐어진 칼은 많은 귀족들을 도륙하는데 사용되었다.
루터의 성경을 통한 개혁사상은 사회를 진동시켰다. 독일 뿐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개신교 신앙으로 새로운 가치관과 세상이 재편되고 있었다. 이 현상은 다르게 보자면 혼란기로 보였다. 루터는 혼란기를 하나님 말씀으로 다시 회복하고자 목적하였다면, 뮌처는 이 혼란기를 종말 현상으로 보았다. 루터는 교황을 사탄으로 비판한 반면, 뮌처는 귀족 전체를 사탄으로 보았다. 뮌처의 과격성은 여기서 증폭된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사탄이 거룩한 모습으로 가장하는 것처럼, 지배자들이 사탄이 변장한 모습이라고 보았다. 귀족은 곧 농민의 적이었다.
세상은 사탄의 등장으로 대혼란에 빠져들고 농민들은 마지막 때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뮌처가 주장한 믿음은 그러나 사회 전복을 위한 믿음이었다. 성경에서 이모저모 추출하여 조립한 모자이크 같은 사상이었다. 뮌처는 급진적 사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농민들을 몰아넣었다. 루터는 이들을 ‘쥐떼’라고 불렀다. 올바른 목표도 없이 몰려다니며 질서를 무너뜨리는 집단으로 보았다. 루터는 결코 무장한 농민을 도울 수 없었다. 16세기, 뮌처나 루터나 개혁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과연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개혁가일까. 그리고 오늘날 개혁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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