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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의 선구적 개혁자, 교육자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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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용상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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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계몽운동가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충청도 아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신식군대인 별기군 창설의 주역이었던 윤웅렬의 장남으로 다섯 살 되던 해에 벌써 한학을 연마하였다. 그가 아홉 살에 한양으로 상경하였다. 한편 그는 2년간 학자 어윤중의 문하생으로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관이었지만 개화에 일찍 눈을 뜬 부친의 영향을 받아 1882년 9월20일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58명의 신사유람단 제2진에 합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나이가 가장어린 17세에 일본방문을 하게 되었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윤치호는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도쿄로 향하였다. 필담(筆談)으로 일본 관리에게 “언제부터 기차가 다녔습니까?”물으니, 흰 종이에 ‘1872’라고 써 주는 것을 보고 윤치호는 깜짝 놀랐다. 또한 일본의 근대화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3개월간의 시찰을 마친 후 그는 약 2년간 그곳에 남아서 일본 최고의 개화사상가인 나카무라(中村正直)가 설립한 중등과정의 사립학교인 동인사(同人社)에 입학을 하였다. 거기서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일본유학생이었다. 한편 윤치호는 1883년 1월부터 요코하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사의 협력으로 다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시절 국내 개화파 인사를 비롯한 일본개화파인사, 재 일 외국인 외교관들과도 교류를 쌓으며 국제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1883년 5월 초대 주한 미국 공사로 부임하는 푸트(L.H. Foote)의 통역관으로 함께 귀국하였다. 1884년 6월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S. Maclay)가 내한하여 김옥균을 통해 한국 선교활동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본 고종은 학교와 병원사업만을 허락하였는데, 이 과정에 미국 공사가 개입하였으며 윤치호는 그의 통역관으로 참여했다.

한편 그는 외국어의 능통한 실력을 인정받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主事)로 임용돼 통역하는 업무와 공문서 번역하는 일을 보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가까이 하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그렇게 이들과의 친분을 두터이 하였기 때문에 1884년 12월4일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여기 공모자로 몰려 그는 상하이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유학길의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푸트 영사의 추천으로 상해에 있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앨런이 설립하고 남감리교 선교부가 운영하던 미션학교인 중서서원(中西書院) 중등과에 입학하여 3년 반 동안 수학을 할 수 있었다. 처음 2년 동안에는 원치 않았던 상하이 망명생활로 좌절하며 주색잡기에 빠져 방황의 세월을 보냈으나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변화되게 된다. 1887년 4월3일 신앙고백서 원봉진교서(願奉眞敎書)를 제출하고 중서서원 교수인 본넬(W.B. Bonnel)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오전 10시, 세례를 받았다.... 오늘로부터 주님을 믿고 성교를 받들기로 굳게 결심했다. 가히 일생에 있어 제일 큰 날이라 하겠다.”(󰡔윤치호 일기󰡕 중에서)

『…… 1886년초로부터 그 해 말에 이르러 저는 지금껏 제가 추구하던 것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연유는, 저의 악함을 깨닫게 되었고 장차 올 세상을 위해 순결한 영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전에는 믿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으론 진정 죄 없이 산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최근까지 유교의 사서(四書)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적잖은 교훈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교훈에 매인 바 없었고 또 그 가르침들이 영혼의 문제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였으므로 제가 구하는 바를 그 곳에서 찾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악한 행실들을 떨쳐 버리려고 애를 썼고 꿀처럼 좋아했던 몇 가지 대표적 죄를 없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습니다. 이런 노력은 성경과 다른 신앙서적 및 신앙강연들에게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 저는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그 소원하는 바는, 제가 가진 시간과 달란트, 그것이 한 달란트든 다섯 달란트든 그것을 성교(聖敎)신앙과 지식 증진에 쓰렵니다. 그리하여 상제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 자신과 제 형제들을 위해 유익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밤(죽음)이 닥쳤을 때 구원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고 또 갈래길에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상제님이 사랑이심과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습니다……』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원봉진교서(願奉眞敎書) 내용 중에서)


이로써 마침내 미 남감리회 소속 교인이 된 윤치호는 선교부의 추천으로 188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감리교 다락방 본부가 있는 네슈빌에 위치한 밴더빌트대학에 입학하여 조선인으로서 첫 유학생이 되었다.

윤치호는 이때 네슈빌에서 열린 미국 세계선교신학생대회에 안식년이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이 대회에 참가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신학생들이 너도나도 조선선교사로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조선의 호남지방으로 선교사를 대거 파송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호남선교의 공로자로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하여 윤치호를 높이 평가하면서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한편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을 겪음으로 혼란한 때에 1895년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는 에모리대 총장 켄들러 박사와 중서원장 앨런박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에 많은 선교사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편지에서 “내가 모은 돈 200불을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그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켄들러는 이런 그를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환상 중에 간청한 ‘마케도냐 사람’이라고 하였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에서 활동 중인 리드(C.F. 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리드 선교사는 1895년 10월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고,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고 1897년 캠벨부인이 입국하여 1898년 내자동에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학교 내에 예배처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자교와 종교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한편, 윤치호는 1895년 귀국 후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학무협판(문교부 차관) 등의 관직을 지내는 등 정부요직을 맡게 되었고, 한편 1897년에는 독립협회에 가담하였으며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한편, 1904년 영국 극동함대 한 척이 제물포에 입항하였다. 함대 사령관이 양국의 애국가를 연주하겠다고 하였다. 당황한 고종황제는 윤치호 외부협판을 불러 즉시 애국가를 제정하도록 지시하였다. 하명을 받은 윤치호는 기도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애국가를 4절까지 작사하는데 성공을 하였다. 그가 작사한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을 붙여서 영국 함대가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첫 번째로 연주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애국가 가사는 1907년 감리교회에서 제작한 찬미가 제14장에 수록되는 역사를 남겼다.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윤치호는 국권이 상실된 마당에 그냥 앉아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마침내‘자강운동’을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갔다. 이 무렵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의 지원을 받고 개성에 한영서원(송도고등보통학교)을 설립하고 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윤치호를 주모자로 지목하였고 그는 3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한편, 1913년 석방이 되었으나 그 이후 윤치호는 친일적 성향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서글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최남선과 신익희의 권유를 거부하고 언론지에 불참 이유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일제 말기에는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하였다. 드디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친일파로 규탄의 대상이 되었으나 자기합리화와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그해 12월6일 개성의 자택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하였다.

개항의 선구적 개혁자며 기독교인으로 애국가를 지어 민족의 여망을 깨우친 교육자며 언론인이기도 한 좌옹 윤치호는 뼈아픈 역사의 현장 속에서 영욕의 세월을 살다 죽어갔다. 애국가 의 역사적인 가사를 작사하는 공적을 남겼지만 일제 말엽의 불운의 친일행위로 말미암아 결국은 ‘작사자 미상’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생애는, 역사의 냉혹한 교훈을 알아 이 시대를 사는 참된 기독교인으로서 한 길만을 끝까지 치열하게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아픈 교훈으로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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