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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도시를 가다 -뮐하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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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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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처가 이끌던 농민전쟁의 마지막 전투지 뭘하우젠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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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루터가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확산해가는 동안 독일 사회는 요동치고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와 예배, 예식에 대한 반성, 교황제도의 비성경적 왜곡을 바로 잡고자 한 점이 중점이었다.
한편 독일 사회는 이와 함께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으니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귀족으로 대변되는 기존세력과 농민, 수공업자, 직조공들로 구성된 신흥 세력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이들 중 종교개혁을 자신들의 권력과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활용하려 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토마스 뮌처(Thomas Muentzer)였다.
뮌처는 1489년 독일 중북부 스톨베르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공부하고 수도원에서 수학하는 등 신학, 교양수업을 쌓고 목사로 활동하였다. 비텐베르크를 방문하면서 루터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만, 루터를 비판하게 된다. 루터가 보이는 행동이 귀족에게 아부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뮌처는 처음부터 기득권 세력에 반항적인 성향을 보였다.
당시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귀족 수하에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농민들은 여러 면에서 궁핍한 삶에 시달렸다. 작황은 오랫동안 좋지 않았고, 영주들에게 내야할 세금은 줄어들지 않았다. 누려야할 권리보다 책무가 늘어나다 보니 사회적 불만이 가중되어갔고, 노동이다 전쟁이다 강제로 끌려다녀야 했다. 농민들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시민권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탄압 뿐이었다. 여기저기서 농민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뮌처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길을 걸었다. 성경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기득권층인 귀족을 타도하기 위해 무력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다. 칼을 이용해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급진적이며 과격한 뮌처의 이미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신비주의적 체험을 강조하던 뮌처는 농민들이 전쟁을 하는 동안 낮잠을 자기도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꿈을 통해 계시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뮌처는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들을 이끌고 뮐하우젠(Muehlhausen)에서 전투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뮌처는 동지였던 파이퍼와 함께 1525년 5월 27일 참수되었다.

뭘하우젠 시에 세워진 토마스 뭔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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