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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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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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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부르크 종교회의 기간, 루터가 머물렀던 집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루터의 도시를 가다(21)


1529년은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이 세워진 지 2년이 지난 해였다. 그 해 필립공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지도자들을 모아 신앙고백의 주요 신학적 논제를 논의하도록 자리를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독일의 루터파와 스위스의 개혁주의파가 주동이 되었다. 그런데 필립공의 의도는 개신교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의견을 통일해 구교도에 대한 저항 전선을 펴게 하기위한 전략이었다.
그해 10월 독일과 스위스 각처에서 지도자들이 모여들었다. 루터와 쯔빙글리를 위시하여, Ph.멜랑크톤, M.부처, J.외코람파드, J.쉬투름, C.헤디오, J.요나 1세, A.오시안더, J.브렌츠, S.아그리콜라 등이 그들이었다.
명실공히 종교개혁 시대를 대표하는 신앙지도자들이며 신학자들이었다. 그들이 다룬 주제는 성찬식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성찬식을 집행할 때 성찬에 그리스도가 실재로 임재한다고 주장했고, 쯔빙글리는 성찬은 신앙의 고백이며 기념이라고 이해했다.
이 논쟁은 해가 지나도 화해되지 못했는데, 필립공은 자신의 영토에서 서로 다르게 이해되는 성찬론이 하나로 통합되기를 기대했다. 신앙고백이 같아야 정치적으로도 연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처의 집념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찬론에 대한 두 개의 이견은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비록 루터와 쯔빙글리라는 거물급 개혁가들이 만나기는 했지만, 그래서 1529년의 마르부르크 종교회의는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행사가 되었지만 성찬에 대한 이해의 본질적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루터파와 개혁주의파 신학 논쟁은 끝내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다. 이 모임은 필립공으로 하여금 막강한 힘을 구축하게 했지만 루터파 독일로부터 스위스의 개혁주의파가 결별하는 아픔을 낳게 했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루터는 종교회의가 만족스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결렬되자 쯔빙글리와 자신 사이에 놓여있던 탁자보를 가위로 잘랐다고 한다. 마르부르크 종교회의가 이루지 못한 연합은 나중에 독일내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의 조직체인 쉬말칼덴 동맹이 결성하게 될 때 스위스 개신교도들이 참여하지 않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이 성경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니 역설적이라 아니할 수 없는 대목이다.
종교회의 상상도(1557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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