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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 “인천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절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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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용상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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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처음 들어온 성시 인천에서 한국교회의 각 교단 중앙지도부의 분열현상이 마무리되면서 인천지역 복음화를 위한 협력과 교회간의 화합, 연합사업을 목표로 지난 1963년에 발족된 인천기독교연합회.
지금은 인천의 3000여 교회와 100만 교인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지금까지 부활절연합예배를 비롯한 공통적인 선교사업 등 각 교파간의 친교 및 협동정신을 통해 인천 지역의 복음화와 성시화를 위해 주력하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지금의 인천기독교총연합회가 있기까지 그동안 기도하며 터를 닦아온 인물들을 만나 라이프 스토리 및 최근의 근황과 인기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29대 인기총 회장으로 백주년기념탑 건립비 청산에 기여

성결교단 총회장, 성서공회 부이사장 등 교단내외적 활동

 

 

 

 

 


교회연합 활동에 기여

장자천 목사(신생교회 원로목사)는 지난 1979년 한국 성결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송현성결교회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2002년 은퇴 시까지 교회 부흥을 위해 주력하는 가운데 1990년 1월 29일 송현성결교회에서 열린 제29차 정기총회에서 제29대 인천기독교연합회장으로 선출돼 인천 교계의 연합운동과 인천시 복음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장 목사는 연합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난 1986년 건립 후 제막식까지 가졌지만, 건립비를 청산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당시, 선교백주년기념탑 청산위원회를 조직하여 건립비 청산에 기여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한편 인천기독교회관 건축을 위한 교단대표와 사단법인 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 이사 등을 맡으며 인천기독교연합회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또한 장 목사는 회장 재임시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부활절새벽연합예배를 개최하여 인천교회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6.25 한국전쟁 40주년을 맞아 인천실내체육관에서 이만신 목사를 강사로 6.25 상기 각성대부흥성회를 갖기도 했다.

장 목사는 교단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통해 교단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으며, 기독교계 연합사업에도 기여를 했다. 교단적으로는 부총회장(1994년)을 시작으로 총회장(1995년), 재단이사장, 서울신학대학교 재단이사, 목회신학연구원 초대 운영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초교파적으로는 성서공회 부이사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해 한국기독교 TV 운영위원장으로 기독교 TV가 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신앙과 목회 경력

6.25 한국동란 때 치열한 낙동강 전투에서 죽음의 위기에서 청년 장자천은 하나님께 “한번만 살려주시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을 한 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러한 서원을 잊은 채 만기 제대를 한 후 대전에서 넥타이와 와이셔츠 등을 판매하는 장사를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면서 수익을 올렸지만, 뜻하지 않게 절친한 친구가 수표를 부도내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게 되었다. 고민하던 22살 청년 장자천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새벽 교회의 종소리를 통해 그를 불러낸 후 한 장로교회에 출석케 하셔서 당시 최고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요나’와 관련한 설교를 들은 후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한 후 26살의 나이에 신학교를 가게 됐다.

성령을 체험한 청년 장자천은 신학교 학생 시절부터 부흥회를 인도하며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어 시흥중앙교회를 개척하여 4년 동안 첫 목회를 하게 되었다. 이후 서울중앙교회에서 고 황성택 목사님을 모시고 부목사로 5년간 사역한 후, 이리중앙교회에서 11년간 목회를 한 후 송현교회에 7대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여 24년간 목회를 한 후 은퇴를 하게 되었다.

“목회는 세상 사람보다 부지런해야 한다”는 특별한 목회 철학을 가진 장 목사는 이리삼광교회 담임 시절 교인들 가정으로 새벽심방을 감행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새벽 심방 후 기도를 받은 가정에서 암 환자와 위장병 환자들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장 목사의 부지런하고 특별한 새벽심방 결과 150명의 교인이 1천여명의 교인으로 부흥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날로 성장하던 교회가 당시 이리역 폭발사고로 교회가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막막한 가운데 장 목사는 기도원서 금식기도 후 예배당을 건축하라는 응답을 받았다. 교인들에게 “예배당은 돈이 아닌 믿음으로 짓는 것”이라고 선포한 후 자신이 먼저 1,500만원이 든 통장을 건축헌금으로 내고 모범을 보인 후 믿음으로 밀어붙이자 시에서 3천만원의 보상금이 나오고, 전국에서 재해기금을 모아주어서 예배당을 다시 짓기도 했다.

은퇴 후 가까운 장로교회를 비롯해 감리교회 등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인천에서 워낙 이름이 알려진 장 목사를 목회자들이 축도를 시키는 등 관심을 가졌지만, 오히려 개 교회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부담이 됐다. 결국 목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동안 체면 때문에 망설였던 개척교회를 하기로 마음먹고 가정교회로 시작한 것이 지난 2002년 5월 개척한 현재의 신생교회다.

 


인천교회의 연합과 일치 절실

인천에서 24년간 목회를 하면서 장 목사가 늘 안타깝게 여긴 것은 연합사업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장 목사는 “인천이 피난민을 비롯해 호남, 충청 출신들이 다양하게 모이다 보니 애향심이 부족하고 연합사업도 잘 안되는 경향이 있다”며 “외형적으로는 교인도 많지만 무엇보다 목회자들이 하나되는 일이 가장 절실하다”며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95년 기성총회장 시절 17개 교단협의회를 구성하며 한국교회의 열치와 연합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아니한 장 목사는 “지금의 한국교회가 대사회적인 신뢰를 회복하고 더 큰 부흥을 위해서는 교파를 초월해 일치하고 연합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와 더불어 사랑을 실천하고 교인들이 성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퇴를 한 후 7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장 목사는 자신이 개척한 신생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도 노력하면서 지금도 미국을 비롯해 해외 부흥회를 인도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며 제2의 목회 인생을 살고 있다. 큰 교회 목회도 했고, 늦은 나이에 교회를 개척하여 평생을 목회에 헌신하고 있는 장 목사는 “큰 교회도 목회에 대한 재미가 있지만, 큰 교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받는 작은 교회가 더 재미있는 것 같다”며 “건강이 허락사는 한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교회 부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의 교회와 인천

장 목사는 인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물론 그가 24년 동안 목회하고 많은 교인들을 양육하고 지금도 은퇴하였지만,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천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복음이 처음 들어온 곳이고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있는 복음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에 인기총 회장을 지내면서 인천의 교회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낀 장 목사는 “복음의 도시 인천이 양적성장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연합하여 참된 교회가 되고, 세상을 사랑으로 이끌어 인천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50여년이 넘게 기나긴 목회여정을 걸어오고 있는 장 목사는 목회의 선배로서 장 목사는 후배 교역자들에게 조언을 한다. “목회는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부지런해야 하고 열의와 열심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부흥을 허락하신다”며 열정을 당부했다.

또한 장 목사는 인기총을 비롯한 교회연합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장 목사는 “내 교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힘을 합쳐서 보다 큰 틀에서 복음화는 물론 지역사회에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때 교회가 능력이 있고 힘이 있다”며 “앞으로도 인기총이 연합과 일치를 통해 더 큰 힘을 발휘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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