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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신념의 30년 정치인생 변함없는 시민의 큰 사랑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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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근표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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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신념의 30년 정치인생 변함없는 시민의 큰 사랑받아’

전국 여성 최초 시의회 의장 역임한

 

박승숙 전 인천광역시의회 의장

 

 

▶안녕하세요.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하셨는지요? 그동안의 정치 인생과 정치 철학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남 4녀의 자녀를 둔 엄마로서 40대에서 50대로 넘어가는 나이에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제가 50여년 동안 몸담았던 인천 중구 소재 중부감리교회에 당시 4선 국회의원이셨던 심정구 의원이 함께 다녔다. 심정구 의원은 같은 교인으로서 정치인의 신뢰와 신념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그때부터 그 분을 정치인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활동을 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저는 민주정의당 시절부터 현재의 한나라당에 이르기까지 정치 봉사 활동을 시작했으며 한나라당 인천광역시당 수석부위원장, 중앙당 중앙위원회 부의장 등 16여년 동안 당을 위해 일해왔는데, 그 자리는 봉사하는 자리이지 월급이 나오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앞장서서 지역사회 발전과 여성 인권 신장 등을 위해 일해 왔다.

사실 그동안 일관된 정치철학과 경제정책을 이어가기 위해 지금까지 다른 당으로 자리를 옮긴 적이 없었다. 야당 시절에도 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나라당이 야당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당을 떠났다. 그때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으며 믿었던 사람에 대한 실망도 컸다. 그렇게 당을 자주 바꿔 정치를 하는 것은 민의를 자꾸 속이는 일이라 생각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인천광역시 중구 구청장과 2·3·4대 시의원, 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정치 경력 30년의 베테랑 여성 정치인이다.

그녀는 1995년부터 가슴에 배지를 달고 정식으로 정치인으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2006년까지 11년 동안 인천광역시의회 3선 시의원 활동을 했으며 인천에서 여성 1호 중구청장을 4년 동안 역임했다. 또한 지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전국 여성 최초로 인천광역시 시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지역사회 발전과 여성의 사회 진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으며 2006년에 인천광역시 중구 제24대 구청장을 역임하며 중구의 경제와 관광, 역사를 살리기 위한 정책을 이어왔다.

 

 

▶정치인의 성향은 언제부터 있으셨는지요?

 

나는 1956년에 111년 역사를 가진 인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때 당시 인천여자고등학교 학도호국단 대대장을 했다. 아마 그때부터 지휘관 성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즈음에 교파와 지역을 초월해 남녀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인천시기독학생회연합회 회장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 그때 정치 쪽을 생각하게 됐던 것 같다. 그때 내 성향에 따라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21살 때 인하대학교 교수였던 임택기 씨와 결혼해 이곳 인천 중구에 터를 잡고 가정주부로 살아왔다. 그 당시 70년대에는 여성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동안 정치인으로서 살면서 보람과 기쁨, 정치적 업적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천광역시 중구 구청장 시절에는 먼저 신흥동에 문화회관과 축구장을 건립했다. 또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브리지와 같은 관광명소이자 실용적인 다리를 하나 만들어 이곳 구민들이 관광수익도 올리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그래서 먼저 광명항에서 소무의도를 잇는 다리를 건립하기로 했다. 주변환경과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다리를 설계했으며 지역주민들의 경제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아름다운 소무의대교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해수부에서 다리 건설 허가를 내주지 않아 힘들었다. 그동안 그곳 소무의도 주민들이 다리가 없어 힘든 삶을 오랫동안 이어왔었다.

또한 외국인이 인천을 찾아오면 관광 숙박시설이 변변치 않아 모두 서울과 부천으로 떠났다. 이에 아름다운 바다 경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을 찾아 호텔을 짓기로 했다. 항구 도시의 멋진 면모를 구경할 수 있는 중구에서 최신의 시설과 고객 서비스를 갖춘 ‘하버파크호텔’을 설립했던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중구에 와서 돈을 쓸 수 있도록 해야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공시설을 잘 유지·관리하는 것도 건립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시설관리공단을 설립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 내 대한민국 최초 원조 자장면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을 아시나요? 그때 당시 다 허물어져가고 있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번한 것을 살려낸 것이 바로 ‘공화춘’이다.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처음에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에 보수 재설립해 옛 모습 그대로 살려 인천의 화교와 자장면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자장면 역사박물관을 만들어 문화재로 등록했다. 이 문화재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더불어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복지정책에도 공을 들여 추진해왔다.

내가 14세 때 발발했던 한국전쟁 이후에 단 한 번도 개방되지 못했던 월미산을 시 의원 시절 철책선을 걷어내고 시민에 돌려줬다. 그래서 지금의 전망 좋고 아름다운 월미산이 시민의 품 안에 안기게 됐다.

월미산 운동 코스를 돌아가다보면 그녀가 사비를 들여 심어놓은 해송 100그루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운동 코스 오른쪽에 ‘인천여자고등학교 박승숙 총동창회장, 해송 100그루 심다.’라고 씌어 있다.

 

▶향후 인천의 발전을 위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조부이신 박경선 씨가 내리교회 초대 전도사였다. 시아버님이신 임광익 교장이 내리교회 재단인 남자 영화초등학교 설립자이며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영화초등학교가 사라졌다. 그 학교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으면 문화재가 될 것이었다. 그 정도로 오래되었으며 역사적 의미가 깊었다. 김정연 내리교회 시무장로가 우리 시아버님의 목회활동 역사를 잘 알고 있다.

또한 독립 운동가 김구 선생이 투옥되었던 감옥과 생활했던 곳이 이곳 중구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김구 선생의 동상이 인천 남동구에 자리하고 있다. 김구 선생의 동상을 중구로 이전해야 올바른 역사를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부터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올바로 세워야 일본과 중국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멋대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잘못된 우리나라의 역사들을 바로 세우고 남겨두었으면 한다.

 

/문근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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