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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사할린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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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재규 집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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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실업인회 인천지회 회원 10명은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사할린을 방문하였다. 사할린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한인들의 슬픈 역사를 가진 섬으로 면적 76,400km로 경상남북도의 2배와 전북을 합친 크기다.

섬 주민은 대부분 러시아인이며 최대 소수민족이 한민족이다. 사할린 총 인구의 6%를 점유하고 있으며 한인1세와 후손 43,000명이 살고 있다.

1904년 노일전쟁이 발발하였고 1905년에는 일본군이 사할린을 점령하였으나 일본인은 추운지방을 잘 가려하지 않아서 1945년 8월 25일 소련군이 사할린을 점령하게 되었다. 한인들은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이주를 했다. 스탈린시대에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하였다.

사할린 한인들은 러시아 민족에 의해 러시아화 되고 일본민족에 의해 일본화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갑자기 러시아시대가 되자 러시아 말을 몰라 고생했으나 지금은 러시아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러시아인으로서 떳떳하게 살고 있다. 그들은 한민족으로 일본 국적, 소련 국적, 러시아 국적 그리고 한국 국적 등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 때 강제징용으로 인해 사할린으로 이주되었다. 대동아 전쟁 중 강제징용으로 이루어진 것이 강제연행은 1930~1945년 종전 때까지이며 1941년에 8천명이었으나 대동아전쟁 중에는 한인들이 4만 명이었다. 1946년 미·소 교환협정 당시 일본인은 30만 명이 일본과 중국으로 돌아갔으나 사할린 한인들은 귀한 되지 못한 슬픈 한을 갖고 살았다.

한국은 해방 후 사회가 좌우충돌로 점점 불안했고 소련도 일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수수방관하였다. 일제 강제 징용과 전쟁으로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눈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1945년 공산당이 들어선 후 한국과 문이 닫혀 버렸다.

1947년 모스크바 대학교 유학을 하고 피라미드회사 설립해 설계 및 시공회사 한국종합건설회사 합자회사까지 두고 있는 이채인 회장은 그곳에서 아주 성공한 케이스다. 그런 그의 어머니도 늘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을 뿐 결국 한 번도 못 가보고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 회장의 아버지는 1989년 이후 북방정책으로 여행자유 왕래 후 대구에 동촌 고향에 찾아가서 형제를 만나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 한국을 방문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반면,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하여 인천광역시 부평구 삼산동 영구 임대 아파트에 거주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있다. 그런 그들에게 인천354F 지구라이온스 8지역에서(부총재 김영일-부일라이온스클럽) 매년마다 칠순 팔순잔치를 하고 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오는 24일 부평구청 7층에서 잔치를 한다.

일본은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였고 울산, 경상도 등에서 많이 이주하였다. 경상도 사람이 많고 경상남도 울산 사람도 많다. 사할린 현주민의 말에 의하면 울산 라이온스 클럽에서 아시아나 비행기 전세내서 1년에 한 번씩 꼭 1주일 구경시키고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지금 귀국 원하는 사람은 안산 영구 임대 APT에서 많이 살고 있다.

사할린에는 도둑이 참 많다. 산속 기도원을 가는데 양쪽 산에 차 껍데기만 남은 채 수십 대가 방치되어 있다. 차를 훔쳐다가 부품만 다 빼고 뼈대만 있으며 아파트 앞에 쇠로 만든 개인차고가 줄지어 있다. 통째로 실어가기도 한다.

사할린의 주생산품은 천연가스, 석탄, 금 등 천연자원으로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코르사 코브항구(이민 항구)옆 천연 가스, 액화 공장은 한국 EBS 교육방송에도 소개될 정도로 대단하다. 쁘리고로드 노예 마을에 연 960TON이 생산되며 파이프 800km 뻗어있다.

▲ 구재규 집사인천순복음교회세계걸작사진 연구소장 그리고 사할린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로 9시간 걸린다. 비용은 700$(한화 84만원) 정도다. 하루 2번 비행기 뜬다. 자녀들 공부를 모스코바로 많이 보내고 있으며 웨딩사진작가도 캐논 디지털 카메라를 모스코바에서 사온다고 한다.

사할린에서 생활하는 한인 3세들은 러시아시대 적응을 위해 러시아 말만 한다. 저녁에 자택을 방문해서 자녀들과 말을 해보니 현지인이 다 되었고 러시아어만 말하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인영사관이나 한인 교회에서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한국어공부를 가르쳐야 할 것 같다.

한인 3세인 올가(57세)는 그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한테 한국말을 배우서 한국말을 제법 잘한다. 그는 한국말, 러시아어, 영어 3개 국어는 해야 한다고 했다. 올가처럼 후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어 그들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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