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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비전과 기독교인의 역할 - 독일 통일 사례를 성찰하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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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동독 교회: 탄압과 저항 사이에서

 

 독일 교회는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톨릭은 선교 시초가 8세기였으니 1300년 가까운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개신교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니 현재 50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이 일방적으로 개신교를 탄압한 사건도 있었고, 1618-1648년 사이에 일어난 30년 전쟁과 같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 깊은 시대도 있었지만 독일 안에 수립된 정권으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은 것은 나치 시대와 동독의 공산정권 시대였다. 나치 시대(1933-1945)는 히틀러와 나치추종자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켜야했고, 공산-사회주의 정권 시대(1949-1989)는 역시 유물론적 종교비판에 의해 교회가 혹독한 탄압을 받아야했다. 그러나 나치주의와 공산주의는 교회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동독 사회주의 정권은 정권 수립 후부터 몰락에 이르기까지 동독 내 교회를 해체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교회에 무릎을 꿇었다. 동독 정권의 기독교 탄압은 1989년 평화혁명으로 끝났다. 동독 교회는 분단 이전의 독일복음주의교회(EKD, 루터교)에 다시 귀속하게 되었다.

 

 여기서 동독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교회가 지나온 역사적 행적을 몇 가지 살펴본다.

 

 독일은 나치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분단되었다. 민주 진영은 서독 지역에 영국, 미국, 프랑스 연합군이 주축이 된 군정(軍政)을 설치하였고, 공산 진영은 소련이 동독 지역에 역시 군정을 설치하였다. 19455월 종전과 함께 군정이 활동을 개시하여 1949년 서독은 서독연방 헌법을, 동독도 동독연방 헌법을 선포하므로 두 개의 나라가 등장하였고, 이는 곧 분단을 의미했다.

 

 1949년 가을 동독은 DDR(독일민주주의공화국)라는 국가명으로 출범하면서 자체 헌법을 공포하였는데 교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즉 동독 교회는 당시 독일복음주의교회 산하에 있었다. 베를린 주교 O.디벨리우스(O.Dibelius)가 소련 정권하의 생활이 나치 정권 때보다 더 부자유하다고 저항하였다. 1951년 디벨리우스 주교는 소련 권력이 동독에서 사법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스탈린을 비판하였다.

 

 1954년 독일복음주의 교회의 날에 소망 안에서 기뻐하라는 주제로 동독 국민을 격려하였다. 동독 정권이 기독교 청소년의 입교식을 청소년단 입단식 (공산당)으로 대체하려는 의도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1961년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이 베를린 장벽은 198911월에 무너졌다). 그동안 베를린에서 왕래가 수월했던 교계지도자들은 이 시기부터 자유롭게 대화와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1969610일 동독 사회주의 정권은 끝내 동독 교회를 독일복음주의교회로부터 분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독일 교회도 동서독 교회로 분리된 것이다. 서독 교회가 예전의 이름 EKD로 존속하는데 반하여, 동독 교회는 BEK(Bund Evangelischer Kirchen in der DDR,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복음주의교회연맹)라는 이름으로 분리하였다.


 1982년 대도시에 소재한 교회를 중심으로 월요촛불기도회가 시작되었다.

 

 1989109일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동독 대도시를 중심으로 월요기도회의 인파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교회에 들어갈 수 없는 시민들이 거리에 모여들었다. 라이프치히에서만도 니콜라이 교회를 위시하여 토마스 교회, 미하엘스 교회, 개혁교회가 평화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하였다. 니콜라이 교회는 오후 2시에 이미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로서 평화혁명의 열기가 고조되고 라이프치히 시내만도 약 15만 명의 인파가 운집하였다. 베를린에서는 50만 명 이상을 추정하는 인파가 교회와 거리로 몰려들었다. 평화시위에 경찰이 대거 동원되었으나 발포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동독 정부는 총사퇴하였고 그 후 사회주의 정권은 붕괴되었다.

 

 19891016일 동독 전역에서 평화기도회와 가두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198911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과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개방되었다. 베를린 국경 수비 동독 경찰은 무장해제하고, 서독 시민들이 장벽을 부수고 부둥켜안고 감격해 하는 장면을 바라봐야했다.

 

 19891218일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가 월요기도회를 종결지었다. (그 뒤 니콜라이 교회는 다른 주제로 월요기도회를 계속 갖고 있다.)

 

 1990103, 서독이 통일을 공포하였다.

 

 iv. 통일의 전야제, 평화혁명

 

 1989년 평화혁명은 통일을 가능케 한 전야제와 같은 사건이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여러 사건들을 움직여 교회가 중심에서 그 일을 이루게 하셨다. 동독 교회가 평화혁명의 과정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했던 주변 요인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변화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두 가지 정책을 약속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가 그것이었다. 소련의 체제 변화와 함께 폴랜드의 졸리다리노시치(연합, 노동운동 지도자 바웬사) 운동은 동독 시민의식에 지대한 영향과 자각을 불러왔다. 그들은 소련, 폴랜드, 체코를 모델로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둘째,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재하던 이웃 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화가 동반되었다. 폴랜드와 헝가리가 경제, 정치에서 개방, 개혁을 단행했다. 감시와 감독이 배제된 자유 선거를 실시하므로 사회주의 정권의 색채가 서서히 바뀌었으며 시민들은 그만큼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셋째, 1975년도 헬싱키 국제회의에서 동독 정부는 유럽 국가의 평화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조약에 서명한 바 있었다. 동독 시민들은 그 때부터 개방 정책과 민주화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넷째, 1987년 서독 사회민주당과 동독 사회주의 정당이 상호 협조를 협약하였다. 동독은 이로서 서독의 정치체제를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서독은 동독의 당 서기장인 호네커를 공식 초청하여 상호 협력을 약속하였다.

 

 다섯째,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이 군비축소에 서명하였으며 그 결과 독일 국경에서 중거리탄도미사일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호네커는 동독 군인 만 명을 감축하며 6백 대의 탱크에 들어가는 비용을 시민 복지를 위하여 활용하겠다고 발표하여 화해분위기에 부응하였다.

 

 여섯째, 서방과 서독에서 들어오는 미디어가 동독 시민의식을 깨웠다. 다양한 루트와 방법으로 포장된 미디어는 시민들에게 동독과 서방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제공하였다. 이 미디어들은 나아가 재야 단체와 교회를 통해 동독 내에 확산되었다.

 

 일곱째, 198957일에 있었던 동독 지방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시민들 뿐 아니라 당원, 공무원 등 사회주의 정권과 직접 관계있는 이들에게까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개혁에 대한 열망은 이렇게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계속)

 

 추태화 소장

안양대학교 신학대학 기독교문화학과 교수를 지내고 정년퇴직하여, 현재는 이레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섬기고 있다.

SNS: antelao@hanmail.net / https://m.blog.naver.com/cko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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