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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비전과 기독교인의 역할 - 독일 통일 사례를 성찰하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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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평화혁명과 독일 교회의 역할

 

 동독이 소련 위성국가가 되어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 독재할 때 교회는 어디 있었는가?

교회는 국민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동독 정부는 교회를 해체하고, 국민들의 삶과 가치관에서 교회를 배제시키려고 온갖 전략을 다썼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의 뿌리를 없애지 못했다. 그만큼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에 대해 무지했고,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교회가 그렇게 정치화 해도 되는가?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교회의 정치화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비판받을 일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교회가 정치화 된 사례라고 말할 수 없다. 정당방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아가 교구에 속해있는 교인들을 위한 대리자 역할이었다. 교인 개인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기 불가능했다. 단체로서 교회가 이 의견을 집결시키고 표현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양떼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사회주의 독재가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는데 교회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사안이다. 정권이 온갖 거짓과 위선적인 구호로 국민을 속이고 있는데 교회가 침묵해야 하는가. 나치 정권이나 사회주의 정권은 로마서 131절을 내세우며 국가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사회주의 정권이 하나의 권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과 교회와 신앙을 부인하는데 혈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어떤 권세에서 나온 것인지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면 교회는 저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참고, 필자의 글 <사탄의 자기부정>)

 

 동독 안에 있었던 교회는 국민의 존재의 기반을 보호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동독 국민들은 오랜세월 동안 사회주의 족쇄 아래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회는 동독 안에 있었고, 사회주의 속에 있었고, 역사적 현장 가운데 있었고, 국민들의 삶 속에 있었다. 니콜라이 교회의 휘러(C.Fuehrer) 목사를 위시한 교계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동독 국민들이 바로 그런 무거운 짐에 짖눌린 이들이었다. 교회는 그런 이들에게 열려있어야 했다.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교회의 본질중 하나라고 여겨졌다.

 

 동독 국민들이 평화혁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한 역할은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겠다.

 

 첫째, 교회는 피난처가 되었다. 사회주의 정권으로 탄압을 받으며 자유를 통제당하는 가운데 국민들의 심령은 지쳐갔다. 동독 정부는 끊임없이 교회를 유린하며 기독교 신앙을 모욕하였다. 청소년들은 학교교육을 통하여 무신론에 길들여졌으며 사회주의 정권은 국민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하였다. 그 결과 동독 기독교인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통계에 의하면 1960년도 동독 기독교인은 천4백만 명이 넘었는데, 1989년도에 5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어느 교회는 1949년 당시 천 여명 교인이 있었는데 동독 붕괴시에 다섯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숫자에 목사, 음악전도사, 집사가 포함되었다니 40년 동안 얼마나 탄압이 심했는지 상상케 한다.

 

 구약에서 도피성은 은총의 장소였다. 죄지은 사람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은혜가 있는 곳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가서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 교회다. 교회는 도피성처럼 비밀경찰의 감시와 수색에 쫓기고, 사회주의 정권의 협박과 선전에 지친 국민들이 몸과 마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쉼을 얻고 소망을 얻고 믿음을 재충전하였다. 믿지 않는 자들도 교회 울타리를 통하여 교인들과 시민적 동지의식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교회는 비인간적 정권 아래서 시달리고 지친 국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끌어안고 위로하는 영혼의 쉼터, 피난처가 되었다.

 

 둘째, 교회는 대언자가 되었다. 사회주의 정권의 일방적인 선전은 국민들이 미래를 바로 설정하지 못하게 했다.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말은 구호뿐이었지, 정치, 경제, 교육, 인권 어떤 면에서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동독 국민들은 서방 유럽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과 절망 사이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경찰과 주변의 감시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비판하면 체포되는 사회 구조였다.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한 수많은 저항가들이 민족반역자란 이름으로 격리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 서방으로 추방당했다. 이 때 교회가 국민들의 입이 되어주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였다.

 

 동독 시절 교회가 여러 집회(예를 들면 교회의 날, 교계지도자 회의 성명 등)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표명한 문구들을 보면 이렇다. “교회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한 형제다” “소망 가운데 기뻐하라” “동 서독 안에 복음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복음과 동독에서의 기독교적 삶” “자유와 교회의 섬김에 관하여” “독일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동체”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증인과 섬김의 공동체”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니 - 교회도 다른 이들의 자유를 위하여” “교회는 배우는 자들의 공동체” “평화를 위한 교육”(적을 규정하지 말자) “무기없이 평화를 이루자” “무기없는 섬김은 확실한 (신앙의) 증거” “평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행하자” “믿음을 실천하자” “평화 문제와 신앙고백” “경계를 허물라”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 “교회로서 살아가기” “기독교인과 교회, 이 시대의 질문들” “동독에서, 보다 많은 정의를” “비폭력” “칼을 쳐서 보습을등등. 이런 용어들이 동독 시민들의 의식을 대변하거나 지탱하고 있었다.

 

 셋째, 교회는 예언자가 되었다. 국민들은 동독 정권의 탄압을 역사의 후퇴로 볼 수 밖에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통치가 아니라 독재였다. 그것은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행위이며 퇴보를 의미했다. 교회는 기독교인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의 의견도 청취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저항단체들에게 동기 부여와 장소를 제공하고, 모임을 주선하였다. 교회는 이로서 동독 전역에 저항 네트워크를 조성하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교회 스스로 정치적 발언은 삼갔지만 저항단체를 직 간접으로 후원하므로서 민주화를 도모하게 했다. 예를 들면 베를린 사마리아 교회 에펠만 목사는 교회로부터 멀어져가는 청소년들을 위해 파격적으로 젊은이 문화를 도입하여 예배에 활용하였다.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는 월요기도회를 통하여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했다. 그런 교회가 하나 둘에 그치지 않았다.

 

 넷째, 교회는 중보기도자가 되었다. 월요 평화기도회가 시작된 1982년 경부터(1978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도회 순서에 동독 안의 정의, 평화, 인권, 환경보호를 위해 저항하다 체포된 이들의 명단을 불러주는 시간이 있었다. 또는 그들의 명단을 교회 벽에 걸어놓고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자유를 빼앗긴 동료들과 그 가족을 위로하고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동지애를 확인하며 더욱 연대할 수 있었다.

 

 다섯째, 교회는 시대의 양심이 되었다. 동독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독재와 인권 탄압에 저항한 단체는 1988년에 160개 정도 추산되었다. 그 가운데 교회와 기독교인과 연관된 단체가 거의 대다수였다. 이로서 기독교의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인권 사상이 동독 사회 안에 얼마나 깊게 뿌리를 두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여섯째, 서독 교회의 역할이었다. 서독 교회는 그동안 재정과 물자 지원, 신학과 교계 인적, 인프라 교류 등을 늦추지 않았다. 재정 지원의 경우 1957-1990년 사이에 서독 교회가 동독 교회에 지원한 액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 수준이었다. 또는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된 이들을 보석금을 주고 서독으로 데려오는 활동도 하였다. 서독 교회는 동독 기독교인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서독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지체의식이 이데올로기와 국경을 극복한 것이다.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SNS: antelao@hanmail.net / https://m.blog.naver.com/cko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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