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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결핵퇴치에 헌신한 셔우드 홀에게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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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타 홀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의학공부를 마치고 해주에서 의사로 일했던 Dr. 셔우드 홀은 1930년 안식년 휴가를 받아 미국을 방문한다. 안식년 기간 동안에도 펜실베니아 대학교 대학원에 등록하고 결핵 연구에 뛰어난 "헨리 핍스 연구소"에서 결핵치료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셔우드 홀은 어느 주일에 필라델피아 소재의 교회에서 전국 결핵협회 뉴욕본부(National TB Association)에서 일하는 필립 제이콥스를 만남을 가졌다그와의 만남으로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씰 보급을 처음 시작한 미첼 핫지스(North American 편집장)와 에밀리 비셀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후에 미첼 핫지스와 에밀리 비셀을 방문을 통해 미국 크리스마스 씰 보급의 내용을 듣게 된 셔우드 홀은 조선으로 돌아가면 크리스마스 씰 보급운동을 전개할 결심을 한다. (당시 미국은 크리스마스 씰 보급 운동으로 1907-1930년 사이에 6,1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으며, 이 모금으로 인해 미국 결핵환자의 사망률은 기록적으로 감소되었다.)

 

 먼저 미국 크리스마스 씰 보급과정을 이야기 하자면, 1907년 에밀리 비셀은 노스 어메리칸 신문 편집장이었던 미첼 핫지스를 찾아가 월밍턴에 작은 요양원(Brandywine Sanatorium)을 돕기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팔고 있는 자신을 소개하며 크리스마스 씰 판매를 도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동안 윌밍턴 작은 요양원을 돕기 위한 크리스마스 씰 판매는 매우 부진하였다. 그러나 신문 편집장 미셀 핫지스를 만난 후 그녀의 씰 판매는 급속하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 씰의 가능성을 알아본 미첼 핫지스의 도움으로 씰 보급이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밍톤 작은 요양원은 문닫을 위기에서 벗어나, 더 많은 환자를 수용하고 더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당시 셔우드 홀을 만났던 에밀리 비셀은 자신이 크리스마스 씰을 팔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집 근처에 작은 결핵 요양원이 하나 있었어요. 운영자금이 없어서 항상 어려웠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환자를 돌려보냈습니다. 요양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후원하는 단체도 없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잡지에서 제이콥 리스(Jacob Riis) 라는 분이 기고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은 덴마크의 어느 소박하고 평범한 우체국 직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덴마크에 사는 아이나 홀보엘(Einar Hollboell)는 우체국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집 가까이에 있는 작은 결핵요양원이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아야 하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전부터 우표라는 것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막론하고 다 사는 것이며, 그 값은 싸지만 많이 팔리면 상당히 큰 금액이 될 거라고 평소에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표와 같은 특별한 씰을 만들어 팔면, 누구나 한 장쯤 사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총 판매 금액도 클 것이니, 요양원 같은 기관을 돕는 일은 쉬운 일이 될 거야." 라고 생각한 후,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씰은 덴마크 많은 지역에서 팔렸습니다. 그 결과 그 작은 요양원은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씰 판매로 덴마크에 있는 결핵환자들은 도움을 받았고, 더 나아가 덴마크 결핵환자 사망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당시 이런 내용을 잡지에 기고했던 제이콥 리스도 형제 여섯이 결핵으로 사망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어, 누구든 크리스마스 씰 운동을 미국에서 일으켜 주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갖고 덴마크의 크리스마스 씰 보급운동을 잡지에 소개했던 것이다. 그런 그 글에 영향을 받아 씰 운동을 시작한 이가 "에밀리 비셀"이었다. 우연히 제이콥 리스의 글을 읽게 되었지만 비셀은 그 글을 읽은 후 받은 감동으로 밤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그녀는 월밍턴 작은 요양원을 위해 자신도 크리스 마스 씰을 만들어 팔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팔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고, 또한 전국 결핵협회도 찾아가 부탁했지만 그녀가 들을 수 있었던 소리는 모두 부정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월밍턴, 작은 요양원은 계속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래서 비셀 양은 "노스 아메리칸" 편집자인 "미첼 핫지스"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순간 "크리스마스 씰"의 가능성을 알아본 신문 편집자, 미첼 핫지스는 크리스마스 씰 보급 운동을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크리스마스 씰은 미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결핵환자들이 씰 보급으로 인한 도움을 받았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 셔우드 홀은 크게 고무되어 조선에 돌아가면 "크리스마스 씰"을 보급하여 결핵 퇴치에 힘쓸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미국 전국결핵협회 주관으로 열린 강좌에 참석해 크리스마스 씰 디자인 방법과 인쇄, 보급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지식을 쌓았다. 또한 당시 각 국에서 판매되는 크리스마스 씰을 수집해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크리스마스 씰이 시작된 과정은, 1931년 해주로 돌아온 셔우드 홀은 주변에 "크리스마스 씰"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선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서구적이라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셔우드 홀은 포기하지 않고 서울을 오가며 조선 총독부로부터 크리스마스 씰 발행 허가를 받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한편으로는 '조선 사람이 가진 열성과 가능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크리스마스 씰의 도안'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이에 세계 최초로 철갑을 입힌 군함을 만들어 적의 군함들을 크게 무찔렀던 거북선을 떠 올리고, '거북선이 국가의 적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는 대포' 도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선사람이 가진 민족의식을 자극하게 될 '거북선 도안'을 가질 씰의 발행을 총독부는 싫어 하였다. 이때 셔우드 홀을 도우려 했던 일본 관리는 셔우드 홀에게 일본과 조선 쌍방이 만족할 수 있는 도안을 찾으라 하였다. 그래서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를 상징하는 의미와 "조선의 대문"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남대문"을 도안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크리스마스 씰의 발행은 허가 되었다.


 다음 셔우드 홀은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씰의 제작과 보급에 참여할 수 있도록 "크리스마스 씰 조직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래서 황해도 도지사를 명예회장으로 임명했으며, 또한 "조선의료선교사협의회"와 조선에서 활동하는 각 국 선교단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셔우드 홀의 노력으로 조선의 모든 선교단체가 참여하게 되고,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은 1932123일에 발행된다. 이 때 이 씰을 처음 구입했던 사람이 배재학당 "헨리 아펜젤러"였다. 당시 촉박한 일정으로 인해 씰 제작은 "해주 요양원"이 발행처가 되어 만들어 지기 시작했지만, 그 후 각 국 선교단이 씰 발행에 참여를 결정 하면서, 씰에 표기 되었던 발행처 "해주 요양원"은 삭제 되었다.

 

 또한 각국 선교단의 씰 발행 참여로 셔우드 홀은 이들 선교단이 세운 학교와 교회 등의 협조를 받았기에, '조선 크리스마스 씰 보급'은 조선 땅에서는 전혀 생소한 운동이었어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경비를 다 제하고도 170달러의 이익금을 남겼다. 셔우드 홀은 이 금액을 조선의료선교사협회가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에 협회는 선교병원 중 결핵 퇴치에 힘쓰고 있는 '평양 연합기독병원', '여주 영국교회병원', '함흥 캐나다연합교회병원' 등에 각각 25달러를 보조하고 '서울 세브란스 유니언 결핵병동''해주 구세요양원'에 각각 35달러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결핵 서적 구입비와 연구 실험비로 책정하였다.


 크리스마스 씰이 발행된 후, 셔우드 홀이 받은 편지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다. "저는 당신이 결핵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광고를 보고 씰을 샀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이 씰을 정성껏 가슴에 붙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약은 나의 심한 기침을 조금도 낫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돈을 돌려 주시기를 청구합니다." 또한, 이런 내용도 있었다. "여러 사람들 입에 자자한 그 훌륭한 크리스마스 씰 약을 좀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값은 얼마라도 지불하겠습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씰을 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더욱이 크리스마스 씰을 보기도 어렵다. 아직 만들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도 잇다. 또한, 크리스마스 씰을 가슴에 붙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보급된 크리스마스 씰, 우표와 함께 붙였던 씰이 처음 이 땅에 보급되기 시작한지 90년이 되었다이제는 결핵이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국민병처럼 흔했던 결핵이 계몽운동과 예방, 그리고 치료로 사라졌다고 생각한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병실에서 다시 마주하는 전염병이 결핵이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며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며 조선의 결핵환자치료와 결핵퇴치를 위해 헌신했던 셔우드 홀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강경신 목사(로제타홀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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