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분류

“예루살렘 총회와 제2차 전도여행” / 행 15:22~41

작성자 정보

  • 신용대 목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예루살렘 총회와 제2차 전도여행” / 행 15:22~41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의 공의회를 마치고 다시 안디옥교회로 오게 되었다. 바리새파의 일부의 선동은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난 다음 제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 그것은 제1차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결론적으로 할례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 안디옥교회가 겪었던 논란의 문제가 되었던 거짓 가르침은 그곳만의 문제가 아니었다(행15:1, 5). 예루살렘공의회의 결정문이 안디옥 뿐만 아니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까지 배달된 것으로 볼 때, 구원론에 대한 혼돈은 모든 이방의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었던 문제였던 것을 알 수 있다(행15:23).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문

 

1) 할례주의자들의 문제는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가 된 형제임을 밝히고 오해를 풀었습니다(행15:22~23). 그래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유다와 실라를 택하여서 결정한 사항에 대하여 편지로 보내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행15:25~27).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를 가르치는 성령님과 함께 이 할례의 문제로 말미암아 생긴 것은 아무 것도 너희들에게 짐을 져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임을 말하면서 우상의 문제, 결혼의 도덕적 문제, 동물이라도 목매여 죽이는 것 이외에는 너희들에게 짐을 져주지 않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는 것과 평안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편지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2) 교회는 교회 내부에 있는 할례주의라는 복병을 이처럼 잘 처리하고 해결하였습니다. 갈등은 또 다른 아픔과 상처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누구 하나 이견을 달지 않고 순복하였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도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에 전달된 결정 편지

 

무슨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로가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결정 된 사항들을 준행하고 건설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 공의회가 결정한 사항에 대하여 보낸 편지를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했다는 것은 정말로 귀한 일입니다. 우리교회 모든 가족들이 언제 어디서나 예루살렘 공의회와 같이 막힌 담을 헐어주고, 엉킨 문제를 풀어주고, 상한 마음을 치료해 주는 걸어 다니며 숨 쉬는 편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회복되는 은혜를 꿈꾸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2차 전도여행의 시작

안디옥교회가 할례파의 문제를 해결할 즈음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다른 교회들 역시 안디옥교회가 겪은 문제를 동일하게 통과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행15:23, 36).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다시 세워진 교회들을 방문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가고자하는 길에 예기치 않은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사촌인 마가 요한도 함께 동행시키자는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행15:37~39).

누가가 부끄러운 문제를 여과 없이 그대로 다루는 이유는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 갈라섰다고 해서 서로 간에 원수처럼 지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를 여전히 '나의 동역자'라 불렀으며(롬16:21), 마가에 대한 애정도 회복하였습니다(골4:10, 몬1:24, 딤후4:11). 그리고 이들은 서로 경쟁적 공생(共生)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역지에서 각자의 소명을 따라 복된 상생(相生)의 방식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복음은 여전히 더 많은 곳으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제2차 전도여행의 출발은 여러모로 어수선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로 볼 때 바나바는 이일 이후에 사도행전의 무대에서 일단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역의 초점이 바울에게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바울과 바나바의 대립은 어떤 식으로든 결코 옳다 인정받을 수 없는 성숙치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성숙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의 사이에 씻을 수 없는 극한 대립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서 혹 내가 마가와 같은 위치에 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신용대 목사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