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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생매장당한 3000여명의 순교자와 해미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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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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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성당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서해대교를 지나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조용한 해미읍 조용한 소도시에 높이 솟아있는 순교자기념탑이 웅장하게 보인다. 이곳이 3000여명이나 예수이름으로 산채로 생매장된 순교현장이다. 또한 병인박해 때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당한 해미읍성이 있는 곳이다.

충남 서산 해미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500여 년 전에 축조된 석성으로,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며 충청도 지방의 군사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군관으로 근무했던 곳이다. 또한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당시 내포평야 13개 군현에서 수천 명의 신자들을 잡아다가 가두고 고문하고 처형했던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1790~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그리고 천주교도 1000여명이 처형되었던 1866년의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끊임없이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곳이다. 이 박해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감옥 두 곳에는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가 교수형, 참수형, 석형(돌을 던져 살해하는 것), 백지사형(손을 뒤로 묶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후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시킴), 동사형, 그리고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아들어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 형,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참혹한 죽임을 당했는데, 당시 해미읍성 서문 밖은 천주교인들의 시체로 산더미를 이루고 그 피가 내를 이룰 정도였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68년 무진박해까지의 대 박해 시기에는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 여러 명을 눕혀 돌기둥을 떨어뜨리고, 해미진영 서쪽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손을 묶어 구덩이에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버리는 생매장을 자행했는데 이때 순교자의 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죽어가면서 외친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라고 외치며 기도를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또 여름철에 더위에 구덩이를 파기 귀찮으면 밧줄에 묶인 신자들을 둠벙에 거꾸로 쳐 박아 수장시켰다. 이를 죄인(?)들이 죽은 곳이라 하여 ‘죄인둠벙’이라 한 데서 ‘진둠벙’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 호야나무

 

 

현재 이곳 생매장터 에는 높이16m의 순교자기념탑과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 근처에 진둠벙과 예수고난의14처, 노천성당, 그리고 합장묘성지 안에는 발굴된 유골이 그때 일을 증언하고 있다. 한편 가까운 해미읍성 내에는 신자들을 매달아 처형했던 호야나무(회화나무)가 그 순교자의 아픈 흔적을 갖고 서 있다. 또한 서문 밖 순교지에는 자리개돌이 보존되어 있어 그때 상황을 설명하듯 붉은 핏자국의 흔적을 보는듯하다. 이로써 해미읍성은 문화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여숫골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과 관광행렬이 끊이지 않는 가톨릭의 성지로 대표적인 명소가 되고 있다.

해미읍성은 가톨릭신자들의 박해와 순교지 중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순교한 곳이다. 하지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이들 순교자 중 70여 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을 뿐, 대부분의 신자들은 당시 천대받는 민중이었으므로 이름조차 알 길이 없어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그러나 인간이 쓴 역사책에서는 잊히더라도 예수이름으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당한 이들의 이름이 생명록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또렷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주소 : 충남 서산 (해미IC에서 45번 국도를 타고 서산방향으로 5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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