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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여명을 밝힌 숭실학당(숭실대) 설립자 베어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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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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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년경 숭실학당

 

 

▲ 베어드 선교사

 

베어드(W.M. Baird, 1862~1931 한국명: 배위량)는 미국 인디아나 주에서 출생했다. 1885년 하노버 대학, 1888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원래 중국선교사로 갈 예정이었으나 북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베어드는 아내와 함께 1891년 1월29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틀 후 인천항으로 들어와 다음날인 2월3일 서울에서 개최된 북장로교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부산지부 선교사로 공식 임명되었다. 북장로교는 부산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본인 거주지 밖에 있는 영선현의 땅을 매입하였고, 베어드는 1891년 9월 부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베어드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는 초량교회(구. 영선현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한국 최초신자였던 서상륜과 그의 동생 서경조, 황해도 장연 출신 고학윤 등, 초기 전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를 하였다.

베어드는 1895년까지 4년간 부산에서 일하다가 대구로 옮겨 제일교회와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하고, 1896년 서울지역 교육담당목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평양으로 옮겨 사재를 들여 1897년 10월10일 자택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을 데리고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숭실학당은 1900년에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으며, 1905년에는 대학부 설치를 대한제국의 정부로부터 인가받아 미국 장로교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 운영을 하기로 결의하여 감리교와는 1914년까지, 나머지 선교부들과는 숭실학당이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평양 숭실대학은 일제강점기 을사보호조약 반대운동, 3.1 만세운동, 105인 사건, 광주 학생운동, 그리고 신사참배 거부 등 당시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또한, 한반도에 교회를 만드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10년에는 학생들이 학비를 아껴 손정도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하는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주역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해방 후 평양에서는 학교재건을 못하고, 1954년 4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상도동에서 다시 학교의 문을 열었다. 해방 후에도 한경직, 박형룡, 강신명 목사 등 한국교회의 기둥과 같은 분들을 배출하며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 한경직기념관(좌)과 한국기독교박물관(우)

 


한편 숭실학당은 베어드 교장의 엄격한 학칙 준수와 철저한 기독교 교육으로 정평이 났다. 성경공부와 주일예배는 엄격한 규율 아래 철저히 지켜졌는데, 출석부에 도장을 찍어 예배 참석자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자치, 자력, 자전(자력 전도)의 이른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한국 실정에 맞게 교육에 적용시켰다.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앉아서 글만 읽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던 뿌리 깊은 의식을 개혁하기 위해 학생들의 학자금 자급 제도와 자립정신을 제1의 교육목적으로 삼았다.

베어드는 1916년 숭실대 학장을 사임한 후, 성서 번역 및 기독교 문서 출판을 통한 문서 선교사역에 전력하며 근대 출판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베어드는 선교사로, 한학자로, 교육자로 헌신하다 1931년 11월 29일 장티푸스로 평양에서 소천 하여 유해는 평양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되었다. ▲ 박경진 장로진흥홀리투어(주)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02)2230-5151 양화진에는 베어드 가족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부산과 대구를 개척한 선교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베어드 선교사 부부는 개화기 한국에서 두 자녀를 풍토병으로 잃었다. 부인 안애리(Annie L.A. Baird, 1864~1916) 선교사는 미국에서 암치료를 받다가 남편의 사역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온 뒤 숨을 거뒀다. 이처럼 베어드 선교사 부부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와서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희생하기까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특별히 우리가 일제강점기로 미래가 안 보일 때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어,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근대국가의 기본 틀을 다질 수 있었다. 이 땅에 와서 젊음과 생명을 다 바치고 자녀들의 목숨을 거룩한 제물로 바치기까지 희생한 그들은 죽어서도 이 땅에 묻혀 묘비로 남아 있다. 이들의 삶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곳에서 예배하는 삶이 가장 영광스러운 삶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주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511 숭실대학교 (한경직 기념관, 한국기독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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