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여백 분류

강단여백 | 영성 없이 신학이든 목회든 하려는 이들에게 외침

작성자 정보

  • 정찬성 목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유 권사님, 며칠 전 제 책상에는 제 아내의 깔끔한 손 글씨로 된 메모가 놓여 있었습니다. “신학은 많고 신앙은 적고, 기도회는 많고 기도는 적고, 단체로서의 수는 많고 신앙의 개인은 적고, 사람의 지혜로운 운동은 많고 하나님 자신의 권능의 일은 적다. 이 많은 일이 적게 되고 이 적은 일이 많게 되어야 세상은 바른 세상이니 그러면 세상이 그렇게 되기 위하여 지금 세상은 한 번 뒤집혀야 한다. 아! 세상은 역시 혁명을 요한다.”
(최태용 목사가 <영과 진리>란 책의 “많은 일 적은일” 중에서)

“토요일을 당하면 명일 주일 설교준비가 극난이었다. 어떻게 유식하게 할까? 어떻게 비극으로 하야 청중의 심정을 흔들까? 어떻게 웅변으로 할까? 어떻게 칭찬을 받게 할까?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연구하였다.” 덧붙여서 “성결치 못한 나는 형식으로 꾸며가고 심령이 부패한 나는 표면만 단장하기를 힘썼다”(이명직의 “은혜기” 1924년 9-10월 <활천>)

위에 인용한 글은 한국적인 교회를 주창한 복음교회의 창시자인 최태용의 글이고, 아래 글은 초기 성결교회의 대부였던 이명직 목사의 글입니다.

유 권사님, 제 아내가 사모님들이 2년 동안 공부하는 신학과정인 “사모신학”을 다니고 있는 것은 온 교인들의 기도제목 아닙니까? 암을 앓은 후유증으로 피곤하지 말아야하는데 괜찮겠나 하는 염려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한국교회의 영성 새로보기>란 책을 읽고 리포트를 쓰는 숙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나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인가?

유 권사님, 열심히 기도하는 이용도 목사의 글을 읽은 날은 남편이 기도 안하는 목사로 매도됩니다. 신학적인 깊이를 더하고 외국유학에서 돌아와서 신학대학 교수를 하는 신학자의 모습에 은혜를 받으면 신학적인 깊이가 덜한 목사로 평가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순교한 신석구 목사나 주기철 목사를 읽으면 십자가와 사랑의 깊이 없는 목사가 되기도 합니다. 남편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걱정입니다.

유 권사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온전하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명직 목사가 토요일이 되면 설교준비하기가 극난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의 경우에는 토요일부터 소화도 잘 안되고 두통도 있습니다만 주일 오후예배를 마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집니다. 예배 끝나고 교인들과 악수하면서 어떤 교인이 ‘목사님 오늘 말씀에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목회자의 길은 극난합니다.

유 권사님, 최태용 목사가 말한 것처럼 “영성 없이 신학이나 목회를 하려면” 또한 얼마나 힘이 듭니까? 내 생각으로 내 방법으로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소하고 순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1935년 최태용 목사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들어온 신학이나 교회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 맞는 신학과 교회를 주장하면서 “소(小)하고 순(純)한 교회”를 세워갑니다.

유 권사님, 최태용 목사는 “신앙은 복음적이어야 하고 생명적이어야 한다.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야 한다.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복음교회를 세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모두가 큰 교회 찾아가기 바쁩니다. 일부러 차를 타고 지역의 가장 큰 교회에 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필경 장사치거나 사업상 그래야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는 성공지향주의입니다.

유 권사님, 최태용 목사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금 세상은 한번 뒤집혀야 한다. 아! 세상은 역시 한 혁명을 요한다”는 이 말이 크게 들립니다. 요즘 기독교를 젊은 사람들은 ‘개독교’라고 하고, 세상에서 제일 믿지 못할 사람들을 기독교신자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잔뜩 기대하고 그 정신인 사랑과 헌신을 요구했는데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이기주의적이고 더 자기만 알고 남들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안하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커서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명직 목사가 오늘의 기독교신자들의 모습을 미리 예견하고 “성결치 못한 나는 형식으로 꾸며가고, 심령이 부패한 나는 표면만 단장하기를 힘썼다”고 무덤에서 통탄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살면 집사가 잡사가 되고 목사가 먹사가 되며 권사가 곤사로 불리고 장노가 장롱으로 취급되는 이 시대에 작은 교회 순수한 복음이 넘치는 혁명이 아니고는 모두 죽는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