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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대부흥사 - 김익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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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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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흥사 - 김익두 목사

마펫(S.A. Moffett, 마포삼열), 그레함 리(Graham Lee, 이길함), 스왈렌(W.L. Swallen, 소안론)선교사는 평양선교의 개척자들이다. 마포삼열의 주도로 1901년 평양에 장로교신학교가 설립되자 이들은 신학교육에 적극 힘을 기울였다.

이들 중, 스왈렌(소안론: 1859-1954) 선교사는 미국 오하이오 주 태생으로, 1892년 한국에 왔다. 이후 1901년에 평양으로 전도 거점을 옮겨 1932년 73세의 나이로 명예 은퇴할 때까지 원산, 평양 등을 중심으로 48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황해도 재령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황해도 일대를 다니며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1900년 안악 장날에 안악교회에서 부흥사경회가 열렸을 때 소안론 선교사 부인도 안악 장터에 나가 전도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깡패 김익두 청년이 나타났다.

그에게 전도지를 건네며 서툰 한국어로, “오늘 밤 안악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하니까 꼭 나오세요.” 하자 김익두는 그 자리에서 전도지에 코를 풀었고 그 모습을 본 소안론 선교사 부인은 “그렇게 하면 당신 코가 썩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날, 김익두는 만취가 되어서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의 코가 썩을까 걱정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중에 지난날의 잘못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이후 절친 박태환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는 금산교회에 입교했다. 1900년,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김익두(1874-1950)는 황해도에서 이름난 깡패였다. 난폭한 성격 탓에 ‘안압골 호랑이’라 불렸는데, 안압읍 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장꾼들은 장에 가는 길에 성황당에서 그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 정도였다. 기독교인이 된 김익두는 10개월 동안 언행을 삼가며, 자신의 생활습관을 정리하였는데, 이때 신약성경을 1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세례를 준비하며 성경을 읽고 있을 때 평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찾아와 “주막에 가서 대포나 한잔 하지.”라고 하자, 김익두는 “내가 요새 구약과 신약을 복용 중인데, 술은 절대 금물이라는 처방이 있어서 안 되겠네”라 하였다고 한다.

 김익두는 1901년 1월에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매서인(賣書人)이 되었는데, 조롱을 당하고 돌에 맞으면서도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며 겸손히 참으며 전도했다고 한다. 이에 소안론 선교사는 1903년에 그에게 신천교회의 개척을 맡겼다. 그의 열심 있는 전도와 설교에 은혜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교회는 급성장했다. 김익두는 190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3회로 졸업하고, 191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편, 1919년 10월의 어느 날, 평안남도 한 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김익두 목사는 동료목사와 함께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는 말씀으로 토론을 하던 중, 마침 옆에 있던 앉은뱅이에게 다가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서 걸어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길로 자신에게 믿음과 능력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아래턱 기형환자 박수진이 고침을 받았고 이듬해 9월 부산진교회에서는 8년 동안 걷지 못한 소년, 등이 굽은 곱사병자, 한센병 환자, 폐병 환자, 혈루병자 등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는 집단적 기적현상도 일어났다. 이때부터 김익두 목사는 신유부흥사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고 가는 곳마다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세파가 거세게 몰아쳤다. 신사참배 거부로 일경의 탄압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여러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겪어야 했던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있던 해 10월14일 새벽, 공산군이 교회당 안으로 난입하여 새벽기도를 드리던 김익두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 일로 김익두 목사는 신도 5명과 함께 순교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부흥사경회를 무려 770여회를 인도하였고, 150여 교회를 설립했으며, 1만여 명의 불치병 환자들을 구했고, 또한 그로 인해 목사가 된 사람도 2백여 명에 이른다. 지나친 성령주의와 전도주의로 ‘고등 무당’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그는 분명 하나님이 크게 쓰신 한국의 큰 목자였다. 그를 통해 일어난 치유와 부흥의 기적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회심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번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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