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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정신으로 선교사역을 펼쳤던 구세군의 마리 위더슨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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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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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위더슨 (1898~1956)

구세군(救世軍)은 1865년 영국의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부스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가 창시한 개신교의 한 교파로, 성직자를 사관, 신학교를 사관학교, 교인을 병사 또는 군우라고 부르는 등 군대식 조직을 갖고 있으며, 복음전파와 사회봉사를 함께 실천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연말의 자선냄비 모금운동은 1891년 샌프란시스코 근교 해안에 배가 좌초되었을 때, 한 구세군 여사관이 쇠솥을 거리에 놓고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는 문구로 기금을 모은 것이 시초이다. 이후 전 세계로 퍼져 현재 100여 개국에서 실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28년 12월에 시작되었으며, 작년에는 현금 모금액이 37억 1736만여 원에 달하여 사상 최고액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구세군의 한국 선교는 1908년 호가드 대령부부가 파송되면서 시작되었다. 양화진에는 구세군의 여러 선교사들과 어린 자녀들이, 그리고 위더슨 선교사가 그들 가운데 깊이 잠들어 있다.

마리 위더슨(Mary A. Widdowson, 1898∼1956, 위도선)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 요하네스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에서 구세군 사관으로 일을 하였다. 1926년에 한국 선교에 비전을 품은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을 만나 약혼하였다. 그녀는 1926년 11월 먼저 내한한 크리스 위더슨을 따라 1927년 가을에 아프리카를 떠나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서울 변두리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며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이때 낳은 첫아들은 자연스럽게 고아들의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되새기며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거리에서 데려온 고아들로 인해 항상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위더슨 부부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사역하는 등 오지사역에 익숙했지만 발진티푸스에 걸려 심하게 앓고 고열로 며칠 동안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회복한 후 가장 먼저 고아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했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몸보다 고아들을 더욱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이들은 한국에서 7년간 봉직하다가 아프리카 케냐로 파송되어 1934년 2월 한국을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너희는 이제 전과 같이 젊지 않다. 만약 내가 다시 한국으로 가라 하면 어찌하려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1953년 1월19일, 7년 만에 다시 한국에 왔다. 6·25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던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들 부부는 구세군을 다시 조직하고 부흥시켰다.
마리 위더슨은 구세군 한국사령관으로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고아원장과 가정단 총재로 헌신하였다. 특별히 위암으로 투병하는 중에도 성탄절에는 자선냄비 모금에 적극 참여하고 거리로 나가 전도하고 동료들을 격려하는 등 열정을 불태웠으나, 한국에 온 지 5개월 만에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압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 마리 위더슨 선교사 묘비

 


한국 땅에 묻히고자 했던 바람대로 그의 유해는 1956년 5월10일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특별히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조문, 위로를 하였으며 김태선 서울시장 등 주요인사 90여명의 조문객으로 인하여 60여대의 차량행렬이 장례식에 늘어섰다고 한다. 묘비는 1956년 9월17일 건립되었으며 묘비에는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다”라고 새겨져 있다. 한편, 그의 남편 크리스 위더슨은 사랑하는 부인을 한국 땅 양화진에 안장하고 묘지 옆에 두 그루의 단풍나무를 심은 뒤 1957년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났다.

구세군 선교사로 두 차례(1927-1934, 1953-1956)에 걸쳐 한국에 와서 헌신했던 이들 부부선교사는 진정으로 한국인을 사랑하였다. 20~30대의 파란 눈의 젊은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열악한 환경의 전염병과 풍토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서양인에 대해 경계의 시선이 가득했던 이 땅에서 조선을 구하기 위해 헌신했다. 이와 같이 오직 복음전파의 사명으로 병든 자를 치료하고 문맹을 깨우치며 희생과 헌신으로 이 땅에서 죽어간 선교사들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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