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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강화의 모교회 - 교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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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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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교회는 교동도를 비롯하여 인근의 섬들에 교회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어머니 역할을 한 강화도의 모교회이다.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미감리회 소속 존스(조원시) 선교사로,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21세의 최연소 선교사로서 내한하였다. 존스 목사는 인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맡고 제물포지방 감리사의 사역을 하면서 인천과 가까운 강화를 선교거점으로 삼고자 1892년 강화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으로 외세에 민감한 강화도민들에게 배척당해 강화남문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인천내리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계를 조직하고 곗날을 주일로 하여 상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였으나 계가 깨지면서 다 흩어지고 교인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이 강화 출신 이승환이다. 강화군 서사면 시루미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던 이승환은 내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라는 권고에 자신이‘세례를 받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첫째는 연로하신 어머님보다 먼저 받을 수 없고, 둘째는 주막집을 운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몇 달 후 존스 목사는 임종을 앞둔 이승환의 모친께 세례를 베풀기 위해 배타고 강화에 갔었으나 그 곳 토박이 유학자인 김상임을 필두로 한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배에서 내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승환은 모친을 업고 갯벌에 빠지며 배로 올라가 달밤에 선상세례를 받게 하였고 곧이어 자기도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이승환은 강화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았으며 마침내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강화도에 첫 교회를 탄생시켰으니, 1893년 봄 강화교산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김상임 공덕비

 


강화선교는 마침내 김초시(김상임)의 개종으로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 그는 교항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훈학자였다. 그는 이승환 모친의 선상세례 소식에 깜짝 놀라며 그 양놈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이승환의 안내로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존스가 찾아와‘형님’하며 넙죽 큰 절을 하자 그의 사려 깊은 행동에 마음이 움직여 1894년 10월, 마을 최고 유지였던 김상임은 마침내 개종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의 개종은 부녀자와 천민들의 종교로만 알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큰 계기가 되었다.

교산 교회는 믿음과 말씀으로 전념하면서 교인수가 50여명으로 갑자기 늘어났다. 지방 유지였던 김상임은 1896년 5월부터 교항교회 전도사, 1898년 본처전도사직분을 받고 강화구역 10여 곳의 교회(가정교회 포함)를 맡아 사역하면서 선교사업에 힘썼다. 그는 인천의 신학회와 1900년 평양신학회에서 공부함으로, 1902년 4월에 감리교에서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 목사 후보가 되었으나 이 영예를 넉 달 앞두고 열병환자들을 심방하다 감염되어 안타깝게도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교산교회는 다른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이러한 헌신의 터전위에, 복음의 씨앗은 전파의 흐름을 타고 선교개시 10여 년 만에 강화도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17개의 감리교회가 세워져 있다.

주 소 :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504 강화교산교회(담임: 박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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