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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목포 공생원과 윤치호 전도사-윤학자 여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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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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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호선생,윤학자여사 흉상

목포 유달산 아래에 위치한 아동복지시설인 ‘공생원’은 일제 치하인 1928년에 외국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전도사 윤치호가 설립한 곳으로 의미가 크다.

윤치호는 1909년 6월 13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부락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부친을 여의고 소년가장이 되었으나 미국 여선교사 마틴(Jullia Matrin)의 도움으로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이후 전남 최초의 교회인 목포 양동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목포는 부산, 인천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항구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걸인과 고아들이 넘쳐났다. 이 시기에 목포에 온 청년 윤치호는 7명의 부랑아들을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고, 1928년 10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라는 의미로 ‘공생원(共生園)’을 설립하였다. 주민들과 마찰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1930년 4월에 목포 유지들과 양동교회의 도움으로 대반동에 목조 원사를 신축하여 1932년 12월 15일에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이후 1937년 4월 죽교동(대반동) 현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공생원 설립 10주년이던 1938년 10월 15일, 윤치호는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1912-1968, 한국명 윤학자)와 결혼했다. 당시 윤학자 여사는 목포의 선교사들이 세운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공생원의 음악교사로 와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윤치호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 목포 공생원 전경

 


한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목포에 진입하였을 때 이들 부부는 ‘고아들을 두고 우리만 도망칠 수 없다’며 공생원을 지켰는데, 이로 인해 인민군 치하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가 마을사람들의 변호로 풀려났지만, 대신 공생원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죽교동(대반동) 인민위원장직을 맡아야 했다. 9월말 목포에서 인민군이 후퇴한 후에는 도리어 인민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무혐의로 1951년 1월 석방되었지만, 얼마 후 식량구호 요청을 하기 위해 도청이 있는 광주에 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당시 42세).

그래도 윤학자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68년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희생과 봉사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의 장례는 목포 최초로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신문기사에 “3만여 명의 조객이 모였고, 목포가 흐느껴 울었다”고 했으며, 1965년 제정된 목포 시민의 상 제1호 대상자가 일본인 윤학자 여사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지역민의 존경과 애정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63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1967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는 등 민간대사로써 한일가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공생원 교회 입구의 윤학자관에서는 윤치호, 윤학자의 평생의 사역을 사진으로 전시해 놓고 있으며, 마당에는 2003년 10월 15일 제막된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의 흉상이 조각된 “사랑의 샘” 기념비(비문-아,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을 생각하던, 두 분이여! 사랑의 샘이여! 여기서 편안하게 쉬십소서) 등 여러 기념비들과 초창기 사용되었던 오래된 종도 볼 수 있다.

이처럼 공생원은 아이들의 먹을거리 마련을 위해 동냥을 마다하지 않아 ‘거지대장’으로 불렸던 윤치호 전도사, 그리고 내 민족 내 부모조차도 버렸던 아이들을 위해 30여 년간 3000명을 돌본 ‘고아들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가 평생을 바쳐 고아사랑을 실천한 곳이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고아 7명을 거둬 ‘함께 사는(共生)’ 세상을 열고자 했던 윤치호 전도사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공생복지재단은 현재 이들 부부의 외손녀 정애라 씨의 운영으로 67명의 원생이 생활하고 있으며 아동, 장애인, 노인복지 등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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