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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같이 영원히 빛나는 황사영 백서와 배론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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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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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성지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있는 <배론(舟論)성지>는 초기 한국천주교 역사와 관련한 중요한 사실들을 품고 있는 대표적인 유적지이다(2001년 충청북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 ‘배론’이란 지명은 이곳 지형이 배 밑바닥처럼 깊고 길게 뻗어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배론성지는 황사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황사영(1775-1801)은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어 앞날이 창창한 인재였다. 그러나 황사영은 탄탄대로 대신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함으로써 험난한 좁은 길을 택한다.
1801년(순조1)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창원황씨 문중에서는 회의를 열고 천주교신자인 황사영에게 이제라도 벼슬길에 나가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깊이 숙고한 끝에 결단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숨어든다. 배론은 박해를 피해 온 수많은 한국천주교회 초기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었다.
황사영은 배론의 토굴 속에 8개월 간 은거하면서 민족복음화와 민족구원을 위해서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그러던 중 그해 4월 19일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는다. 한국교회가 주문모 신부에 의해 북경을 통해 세계교회와 연결되어 왔는데 이제 완전히 동떨어진 외진 변방이 될 처지에 놓일 것을 우려한 황사영은 한국교회의 사정을 북경에 알리는 일을 맡기로 결심한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일에 천주교 신도인 황심(黃沁, 토마스), 옥천희(玉千禧, 요한) 등도 합세하였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서 장문의 서한을 써서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것을 계획한다. 그는 자신이 겪은 사실들과 전해들은 사건들을 요약하여 교우 26명의 순교사실과 활동내용,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순교, 그리고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를 그치게 할 대안 등을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 천위에 붓으로 122행, 12,348자를 깨알같이 써 내려갔다. 이것이 ‘명주에 담은 신심’, 곧 “백서(帛書)”이다. 서론에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설명하고,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상세히 밝혔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한국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으로 ①국제적인 재정원조 요청 ②북경 천주교회와 연락 ③청나라의 종주권 발동책 ④조선감호책 등을 제시하였다.

마침내 황심은 이 해 8월 하순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를 들고 옥천희를 통해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그 해 10월, 이 서한을 중국에 전하려던 옥천희는 국경에서 체포되고 백서도 발각되어 압수되었으며 황심과 토굴 속에 있던 황사영까지 체포되었다. 정부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 6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이 나라를 진멸하여 천주교 탄압을 막아주고, 청국은 조선의 종주국이니 이를 외면하지 말라는 ‘백서’의 내용이 매국적 의도라고 판단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가중하였다. 황사영이 1801년 11월 5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고 관련자들이 순교한 후 백서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다.
한편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 파기 때 문서를 정리하던 과정에서 『황사영 백서(帛書)』원문이 발견되어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이를 입수하였고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때 로마 교황 비오11세에게 예물로 보내져 현재 교황청 선교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황사영 백서 배론성지는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 『황사영 백서』가 탄생한 곳이며 또한,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 잡았던 곳, 두 번째 한국인 신부인 최양업(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배론성지는 천주교 사적과 애환들을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유적지 이다.

1784년에 이 땅에 들어온 가톨릭은 전래된 지 100여 년간 황사영의 백서 사건처럼 핍박하는 정부를 상대로 무력 전쟁을 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으며, 그로 인한 순교자만도 10,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개신교는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9월5일, 선교사 토마스(R.J. Thomas 1840~1866)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 땅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러 왔다가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렇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예수 이름으로 죽어간 가톨릭과 개신교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는 오늘에 이르러 놀라운 열매로 맺혀짐으로 한국교회사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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