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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세상|교회마저 포퓰리즘 해저드에 빠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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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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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사회적으로 포퓰리즘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심각한 현상들이 동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분야에서 포퓰리즘이 지배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기독교마저 포퓰리즘을 따라야 하는가?’
직면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포퓰리즘은 듀이(John Dewey)가 실용주의 가치관을 이념으로 하는 교육사상을 제시한 이래 미국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 사상은 인간의 소유와 욕구를 자극해서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게 했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게 했다.
그러면 실용적 포퓰리즘을 가치관으로 가짐으로 동반되는 문제는 종교적 가치, 혹은 절대적 가치는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은 간과 할 것인가? 특별히 기독교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매우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다. 그럼에도 교회와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종교라고 무조건 합리적 실용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합리적 실용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하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 실용적이기 때문에 문제일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다수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수의 견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옳다고 하지도 않는다. 다수가 완전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절대가치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곧 기독교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요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믿음으로 그 뜻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는 것이다. 즉 창조에 있어서 영원히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깨닫고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곧 신앙이며 삶인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포퓰리즘에 맹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실용적 포률리즘의 가치가 절대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포률리즘의 가치는 현실적 필요와 욕구 그리고 유용성에 그 기준을 둔다. 따라서 가치는 상황과 주체자인 인간의 생각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종교의 본분이고 사명이다. 특별히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를 만물의 시점으로 믿는다. 또한 창조와 더불어 창조주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뜻을 존재의 목적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창조주의 뜻, 그것을 절대가치로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일에 있어서 구현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안에 포률리즘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실용적 포퓰리즘의 가치관들이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그로 인해서 신앙에 있어서 절대가치로서의 성경의 위치가 상실되거나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교회와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긴박성과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현실적 충족을 위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합리화시킨다면 본질의 왜곡일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성격의 가르침을 포기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을 합리화시킨다면 진리에 몽매한 인간은 어디에다 소망을 두어야 할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있는 동안 불과 며칠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이 생각난다. 모세를 따라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며칠을 못 견디고 불안했다. 모세가 없는 동안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겼다. 그리고 그들은 아론에게 그들의 신을 만들도록 요구했고 아론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따랐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일어나 우리를 인도할 신(神)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 모든 백성이 그 위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 가져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刻刀)로 새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출32:1-4)

기독교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이 왜 지도자인가에 대한 대답을 하나님과 자신에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포퓰리즘에 빠지는 것은 이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한 결과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을 믿음으로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절대진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포퓰리즘에 지배당하는 모습으로 지극히 기독교 적일 수 있으나 생명의 복음은 없는 모습으로 치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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