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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제암리교회와 3.1운동순국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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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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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제암리교회.

평화롭기만 하던 농촌마을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서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제의 방화 및 총살로 교인 23명이 순교하고 예배당을 비롯하여 마을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제암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가장 잔혹한 만행의 하나로 손꼽히는 비극적인 역사현장이 되고 말았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서울에서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의 여파가 화성일대에도 불어 닥쳐 3월 31일과 4월 5일 향남면, 장안면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제암리교회 성도들을 상대로 일제의 보복이 감행되었다.

일본군은 제암리교회 성도 21명을 예배당으로 모이게 한 후 교회 문에 못질을 하여 가두고 짚단을 쌓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그 때 불길 속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린 사람과 불길을 보고 달려온 부녀자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날 교회에 감금되었던 남자 21명과 교회 밖 부녀자 2명 등 총 23명이 희생되었고, 가옥 30여 채가 불탔다. 이어 팔탄면 고주리에서는 김홍열 등 천도교 신자 6명이 학살당했다. 그들은 칼로 난자한 후 시체를 나무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웠는데, 사람, 가옥, 가축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 밖에까지 퍼졌다고 한다.

이날 제암리에 일어난 살육과 방화의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시신도 방치되다가 캐나다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이곳을 찾아 처참한 상황을 사진에 담아 서방세계 매스컴에 호소하므로 그 전모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23구의 시신은 장례절차도 없이 인근 공동묘지에 한꺼번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제암교회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남은 자들의 신앙으로 지켜오던 중 1938년, 기와집 예배당으로 재건되었고 1970년에 비로소 일본 기독교인들이 지난날 일본사람들의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모은 성금 1000만 엔을 보내와 교회와 유족회관을 건립하였다.

그러다가 2001년 3월 화성시에서는 사적 299호로 지정된 이곳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설립 및 제암리교회 역사전시관으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희생된 23인의 유해를 발굴하여 순교자 23명을 합장묘로 하고 돌 기념비 23개를 세워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거기 세운 큰 돌기둥에 있는 구멍은 ‘어두운 미래 뒤의 밝은 희망을 본다.’는 의미라고 한다. 한편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시청각교육실에서 ‘아! 제암리여!’라는 제목의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으며, 제1전시관은 제암리의 3·1운동과 학살에 대해, 제2전시관은 일제시대의 역사와 전국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소개를 하고 있다.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제암리학살사건은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초창기 한국기독교가 교육과 의료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근대민족주의의 배양을 통해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하여 3·1운동을 주도했을 정도로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90년 전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의 현장을 보며 당시 한국기독교인들의 애국심과 용기를 확인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민족과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주소 :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산16 제암교회 (담임 강신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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