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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연동교회와 갖바치 출신 고찬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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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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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교회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 무어(S. F. Moore, 모삼열)선교사가 1894년에 교인 몇 사람과 함께 연지동의 조그만 초가에서 예배드린 것이 시초가 되었다. 모삼열은 서울 연못골(연지동) 찬우물골(효제동) 방아다리(충신동) 등 조선시대 사농공상의 최하층인 상인계층과 갖바치 하급 병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종로5가 일대에서 천민들을 상대로 서상륜과 함께 복음을 증거 했다. 이 중 연못골 일대에 마련된 예배처소는 캐나다선교사인 게일(J. S. Gale, 기일)이 맡았다. 이때 얻은 성도들을 기반으로 1894년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연동교회는 시작되었고 1900년 게일 선교사가 초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게일 선교사는 1890년 함경도 원산에 들러 잠시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한 술주정뱅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찬익(高贊翼. 1857~1908) 장로이다.

가죽으로 신발을 만드는 천민 갖바치였던 고찬익은 평안도 안주 출생으로, 30세를 전후해서는 원산에서 살았다. 젊은 시절 자신의 신분을 비관해 노름꾼, 사기꾼, 술꾼으로 방탕하게 생활하였으며 관가에 잡혀가 수 없이 매를 맞고 한때 벙어리가 된 일도 있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음독자살을 시도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게일 선교사의 전도를 받게 된다.

게일 선교사로부터 야곱에 관한 내용이 담긴 “네 이름은 무엇이냐?”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받은 고찬익은 그날 밤 꿈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을 들었다. 깜짝 놀란 그는 “고…고…고”라고만 대답하였다. 최하층 천민인 그에게는 이름의 존재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금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너무나 떨리고 무서워서 “내 이름은 고가고, 싸움꾼이고, 술꾼이고, 망나니올시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하고 살려만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그를 막 때리며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전도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 일 후 그는 게일 선교사를 찾아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 게일 선교사는 앞으로 남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그에게 찬익(贊翼)이라는 이름을 지어 줌으로 고찬익이 되었다.

원산에서 서울로 온 고찬익은 은혜를 갚기 위해 전도를 사명으로 삼고 종로 5가의 갖바치들을 전도하였다. 그의 열심 있는 전도로 연동교회는 매주 새 신자가 등록됐고 1900년 게일 선교사는 그에게 조사의 직함을 주었다. 그리고 1905년 장로선출을 위한 공동회의에서 고찬익이 초대장로로 선출되었다. 종로 5가 일대의 천민들은 자신들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연동교회로 몰렸다. 그러나 양반들이 장로선거에 낙선하자 일부는 교회를 이탈해 봉익동에 묘동교회를 설립하였다. 한편 게일 선교사는 고찬익 장로를 1908년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시켰지만, 목사를 꿈꾸던 고찬익 장로는 안타깝게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식중독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게일 선교사는 고찬익 장로를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꼽으며, 자신에게 노벨상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추천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고찬익 장로를 두고 게일은 교회의 지도자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양민과 천민의 구별이 없다고 하였다. 초기한국교회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늘 감당해 왔으며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되고 있는지, 우리는 주 안에서 진정 변화된 새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지그시 눈을 감고 묵상을 하게 한다.

- 주소 :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6-12 연동교회 (담임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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