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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을 행하는 자, 하나님께 속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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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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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을 행하는 자, 하나님께 속한 자”

 

요삼1:9-12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에 대하여 더 궁금해지고, 성령으로 더 익숙해지는 것을 갈망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엉뚱한데 신경을 더 쓰게 되고 그래서 이 장망성과 같은 세상이 마치 나의 삶의 목적이고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여 어리석게 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에이 그냥 이렇게 살지. 여태까지도 이렇게 믿으면서 잘 살아왔는데, 이대로 믿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가면 되지 뭐.’하고 아주 쉽게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육체의 요구는 결코 신령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령한 것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은 그만한 희생과 나를 많이 포기해야 되는 것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신령한 생활이란 우리가 아무리 바쁘고 분주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조금이나마 주님을 닮아보려는 영적 갈급함을 갖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아니야!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은 결코 아니야! 이런 행복은 영원의 입장에서 보면 한낮 바람을 잡는 것에 불과한 허무한 것들이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곧 신령한 것입니다.

 

●누구나에게 이런 도전(挑戰)이 있어야 합니다. 불가능을 즐겨라!(Enjoy the impossible!)

내 영혼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성령의 소욕을 원한다면 육체의 소욕을 저버려야 되고, 육체의 소욕의 원대로 한다면 성령의 소욕을 배제해야 되니까,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는 영적 전쟁터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바보”가 되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할 때에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아브라함은 떠날 수 없습니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도 바보가 아니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이“바보들의 행진”이 참으로 많습니다. 길도 없는 홍해 앞으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왔던 모세, 창일한 요단 강 앞에서 법궤를 메고 들어서게 했던 여호수아, 그리고 아무런 사후 대안도 없이 여리고성을 돌았던 것 외에 수많은 “하나님의 바보”들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 율법보다“나는 과연 성령으로 사는가?”를 항상 물어야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계명이나 말씀이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부담(負擔)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할렐루야!

 

 

 

이것을 달리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사생활을 간섭하고 지키기 시작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확실한 증거가 “성령의 나타나심”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오늘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를 원하는 소원을 우리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이제 성령은 나의 소원이 아니라 “주님의 소원”자체를 내 안에서 갈망으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의 자취들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사생활의 태평함에만 안주해 있다면 이것은 그 존재가 이미 엄청나게 고장 났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한 영생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외형을 갖고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형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시고 성령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이 으뜸의 자리, 이 영광의 자리를 “모두가 함께” 놓치지 말고 더불어 살아가라! 고 승천하시기 전의 주님은 40일간을 지상에서 더 사셨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는“왕 같은 자녀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 그리고 오늘 여러분과 저의 신앙적 성숙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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