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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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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성욱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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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사할린에 왜가시게 되었나요?

1939년 -45년, 일본인들이 모집, 관알선,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이란 곳에 일을 하러 가야 한다고 하더군. 동네 구장이 모집을 하러 다녔는데 집집마다 한사람씩은 다 가야하기 때문에 아버지 대신 간 사람도 있고, 형 대신 간 사람도 있고... 모두들 그렇게 사할린으로 가게 되었어. 그때 강제징용 간 사람들의 나이가 18-20세 정도 되었던 것 같다오..

 

▶ 그렇게 사할린으로 가셔서 무엇을 하셨나요?

사할린섬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그곳에서 탄광일이나 토목공사 등의 일을 했다오. 탄광(내현, 백포, 돌린스키, 샤코르스키 등)에서 석탄을 캐고, 비행장이나 도로를 닦는 일, 종이공장에서 종이 만드는 일들을 했어. 그밖에도 일본인들이 시키는 일들을 다 했지.

하루에 10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월급을 받지 못했어. 일본인들은 월급을 자신들이 관리한다며 통장으로 넣어준다고도 하고, 한국으로 보내준다고도 했지만 다 거짓말이었다오. 1945년 해방이 되고 우리는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을 했어. 하지만 일본은 우리를 한국으로 보내주지 않았어. 말로는 일본인들을 다 일본으로 보낸 후에 우리도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했지만, 우리만 그대로 남겨두고 다들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지.

그 후 러시아인들이 들어오면서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닫혀버리게 되었다오.

 

▶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으시지 않으셨나요?

당연히 보고 싶었지. 그걸 어찌 말로 다 하겠나.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들도 보고 싶고, 혼인 한지 얼마 되지 않는 아내와 아이도 보고 싶었고...
사할린으로 들어와 일을 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할린으로 초청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에 사할린으로 데려왔지만, 문이 닫혀 버릴지 누가 알았겠나...

고향땅 다시 밟기 위해 걸린 시간이 60년이라니, 참 오래도 기다렸네..

내가 사할린에 있는 동안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나는 가볼 수도 없었어. 나라가 힘이 없던 탓에 씻지 못할 불효를 저지르고야 말았지...

 

▶ 고국 땅에 오신 기분이 어떠세요?

사할린은 동삼(겨울)에 아이들 키 넘게 만큼 눈이 내린다오. 얼마나 추운지 몰라요. 처음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많이 죽었어. 고국 떠난 허전한 마음을 술로 달랬거든. 그 독한 보드카를 마시고 추운 곳에서 잠을 자니 어떻겠소? 얼어죽는 사람들이 많았지.

그런 곳에서 생활하다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에 오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지. 무엇보다 날이 따뜻한 것이 얼마나 좋은지...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할린에 있는 자식들이 보고 싶다는 것이오. 아이들이 잘 살고 있는지 혹여 무슨 일은 없는지... 항상 생각하게 되더군.
그것 빼고는 일없어...(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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