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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어장터를 아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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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성욱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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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당시 황어장터 모습

3·1운동 당시 경인·수도권 만세운동의 도화선 되었던 ‘황어장터’

황어장터 3·1만세운동기념, 청소년 교육의 장으로 민족의식 고양

 

3·1운동이 일어난지 어언 91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민족 독립을 위해 외쳤던 만세운동은 얼마나 피부에 와 닿을까. 교과서에 나오는 연대기 정도로 점점 잊혀 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못내 아쉬워하는 곳이 있다. 3·1운동 당시 경인지방 및 서울 강서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황어장터’다.

 

▲ 황어장터 기념탑



인천과 강서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

“일제에 항거, 목숨을 바쳐 희생한 애국지사 선대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후대에, 특히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의 산교육의 장으로 삼아 민족의식을 고양하고자 여기 추모 기념탑을 세운다”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 위치한 황어장터 복원 건립 취지문 중 일부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의 역사성을 감수한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 환 교수에 의하면 “이곳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은 3·1운동 당시 장날에 수백 명이 참가한, 인천 지역의 가장 대대적인 만세시위”라며 “현재 서울 서북부에 해당하는 강서지방 만세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3·1만세운동의 의미를 되세기고자 인천 계양구청은 2004년 민족의 성지로 황어장터를 기념시설로 복원했다. 기념관에서는 당시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면면을 찾을 수 있다. 계양구는 기념시설 주변의 확보된 부지 643㎡에 광장조성 등 주민들의 편의 공간을 마련하는 사업을 추진해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의 산교육의 장으로 삼을 계획이다.

▲ 경인지방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심혁성 지사


경인운하가 지나는 이곳은 당시 잉어의 산지

잉어가 많이 잡히고 거래돼 황어장터로 불렸던 이곳은 소시장이었다. 5일장으로 조선 시대부터 잡화 및 곡물, 1일 200여 두의 소 거래로 이름난 곳이었다. 1910년대에는 더욱 확장돼 1일 소거래량이 500~600두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이곳의 이용주민이 1000명에 달하는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지역 주민들도 3월 24일 오후 2시쯤 오류리의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을 이용해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대규모 만세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만세운동 진압에 나섰다. 이에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6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체포된 심혁성의 구출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순사는 선봉에 섰던 선주리의 이은선을 칼로 베어죽이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기독교인과 일반 농민 등이 주축이 돼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자 했다.

격분한 계양주민 100여명은 우선 친일 혐의가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의 집을 부수는 등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를 파괴해 친일기관을 응징하고자 했다.


만세운동으로 계양주민 모진 고문 당해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중 이담은 징역 2년, 임성춘은 징역 1년, 최성옥과 전원순은 각각 징역 10월, 심혁성은 징역 8월에 처해졌다.

김영권 김창열 박문칠 배응준 송광현 심혁성 안윤필 유석기(유연봉), 윤해영 이공우이금산 이담(이태현) 이은선 이태완 임성일 임성춘 임창현 전기순 전봉학 전사삼 전상근 전원순 전천능 정태용 조성칠 채귀현 채규명(채상현) 채봉운 채봉혁 채흥봉최성옥 최청일 홍여선 등은 인천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 선인들이다.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심혁성은 1년여의 옥고를 끝내고 논과 밭 그리고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해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처자를 거느리고 산골로 은신했다. 이후 전국 심산유곡을 30년 가까이 방랑하며 약초를 캐어 연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주 등지를 내왕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아직도 만세운동제 적극 가담했던 33인 중 일부의 후손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계양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 전국의 만세운동에도 견인차 역할을 전개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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