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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양방향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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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상인 관장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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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상인 관장  어릴 때부터 알던 속담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침묵이 금이라면 말은 은이요, 수다는 동이거나 혹은 쓰레기라는 것인지...

가끔 너무 말이 없는 직원들, 또는 지인들에게 답답함과 서운함을 느낀다.
‘내가 싫은 건가?’ ‘무슨 불만이 있는 걸까? 컴플레인의 표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드물게 보게 되는 과묵형 지도자가 있기는 하다. 평소 말없음으로 그의 말이 상당히 주목과 집중을 받는 효과가 있긴 한데 어느 땐 그 희소가치 높은 말이 별로인 경우에 또는 말을 해야만 해결되는 경우에 조차 묵묵한 모습 속에서 여전히 이미지는 어려운 사람으로 호감을 갖기가 쉽지 않다.
남성에 비해 여성은 말이 많은 게 사실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더 많이 웃는다. 그리고 말로써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말 많으니 실수 역시 많은 것도 사실이다.
남성의 경우 술 또는 운동 또는 일탈로서 스트레스 해소를 하려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성이 다른 성차의 문제와 각기 다른 성격유형, 게다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나은 방법인지 채점하긴 어렵다.

하나님께서 대화를 시도하신 경우가 너무 많으신 것을 보고 놀란다.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엘리야에게, 다윗에게, 마리아와 요셉에게, 바울과 실라에게...
급기야는 도통 말들어먹지 않는 인간들에게 독자 아들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하셨다!
인간에게 일방형으로 기도하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다가와 대화를 원하셨던 분이시다!

말하기 싫은 상대에게 또 어이없는 오해 속에서, 너무 진행이 진부한 회의 장소에서 침묵이 금이라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큼 답답한 경우는 없다.
최근 정말 단절하고 싶은 상대가 있었다. 수개월동안 미움을 품은 채 괴로워했다.
모른 체 잊고 살려했지만 일속에서 만나야 할 사람인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대화를 시도했는데 받아주지 않아 더욱 힘들었다.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중에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왔고 어렵사리 이루어진 대화... 조금은 실마리를 풀게 되었다. 사실에 비해 오해가 컸던 것도 알게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어 자체로도 그렇지만 양방향이 특징이다. 일방형 커뮤니케이션은 있을 수 없다. 너와 내가 그리고 집단과 집단이, 국가와 국가가 서로의 막힌 담을 허는 시도가 평화와 해결을 가져다준다. 한 번의 시도로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두 번 세 번의 시도로서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자기희생이다.
자존심을 접고 먼저 용서의 악수를 청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 쉽지 않은 시도에 상대가 냉랭하면 어쩌나? 무시를 당하거나 내 마음에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긴 나의 말걸기와 악수를 받아주는 상대방이 있어야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한 것이다.
일흔 번씩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 대화하라는 것 아닐까?
힘들고 미운 상대에게 다가가 말걸기를 시도하라는 뜻으로 들려온다. 그것도 여러 번, 인내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 용서해야 될 원수는 가까이 존재한다. 일곱 번 혹은 일흔번 이상 용서할 대상이 멀리 사는 외국인이거나 친분이 없는 저명인사일리는 없다.
늘상 존재하는 가까운 주변인물 - 가족이거나 친지, 이웃들이다.

그렇더라도 말걸기로서 용서를 시도하는 것, 암만해도 예수와는 견주지 못한다.
그분은 말 뿐 아닌 액션파, 희생의 고통, 피흘림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의 진수와 용서를 실행하셨다.

“같이 밥 한번 먹죠....”
“가을향기 나는 커피한잔 어때요?”
너와 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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