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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야기|새순이 난 꿈나무를 보호해 주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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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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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심히 일했다. 누구든지 나처럼 열심히 일했다면 성공할 것이다.
나는 뛰어난 예술가라기보다 차라리 근면한 생활인이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고교 2학년 추석 때 아버지께 밤새워 나의 꿈을 상의 드렸다. 나의 꿈과 포부를 이해하시고 진학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대학에 합격하면 첫 입학금은 내줄 테니 그 이후에는 아르바이트하여 학비를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나는 그때 가난해 돈이 없어 대학 진학을 못한다는 생각은 머리에서 떠나고 없었다.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밤새워 대학 입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상업학교 공부의 한계와 실력 부족으로 능력보다 더 높은 대학에 응시한 결과였다. 대학 시험에 떨어진 후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며 재수를 했다. 재수를 하더라도 학비가 부담되었다. 그래서 후암동에서 셋방살이하는 이모 집에다 짐만 놔두고 남영동 네거리에 있는 집현전 독서실에서 잠을 잤다. 의자를 몇 개 붙여 침대로 삼든지 아니면 라면박스 몇 개를 눌러 깔아 몸을 눕혔다. 그리고 수송동에 있는 대입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했다. 한 달 학원비가 만 오천 원이었는데 한 달에 이만 원씩 아버지가 송금해 주셨다.
라면 한 끼를 먹는 것도 돈 생각해야 하는 처지의 재수생활은 암울하고 무기력했다. 가난했으나 순수하고 맑게 자라났던 소년에게 서울 생활은 혼돈과 피곤함을 더해 주었다.
입시추위란 말이 실감 날만큼 추운 날 다시 대학입시를 치렀다. 중요한 문제 두어 개를 실수로 틀리는 등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그래도 떨어지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으로 합격자 발표 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과는 또 낙방이었다.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슬퍼하시는 모습이 떠올라 차마 전화를 드리지 못했다. 대신 전보를 쳤다. 죽고 싶은 마음과 함께 불합격이라는 말을 쓰기도 싫었다. 그래서 쓴 전보의 내용은 ‘사멸, 죄송합니다’였다. 정말 죽고 싶었다. 불합격이라는 말 대신에 죽어 없어지고 싶다는 뜻으로 ‘사멸’이라고 쓴 것이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종착역까지 가서 포장마차를 찾았다. 그리고 호주머니를 털어 먹어본 적도 없었던 소주를 들이켰다. 그날 밤 아버지가 야간열차로 상경하셨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나를 찾고 있었다. 독서실 근처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영화나 보러 가자!” 라고 하셨다. 내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신 것이다.
부자가 함께 재미있는 영화를 본 후 저녁식사를 하면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냐?” 아버지께서 먼저 말문을 여셨다.
나는 후기 대학 중에서 제일 낫다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2차 대학에 다닌다는 패배주의와 무엇을 하려 해도 운명적으로 잘 안 된다는 운명주의였다.
육체적 고통과 시련보다 마음의 불편함이 더 큰 고통이란 것을 깨달았다. 공부도 별로 하지 않았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이 생각되었으며 패배주의, 운명주의에 더욱 빠져들었다.
2차 대학에서는 아르바이트도 수월하지 않았다.
동대문에서 덕원각이라는 중국집을 하는 사람의 홍제동 집에서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을 한 달 가르쳤는데, 35등에서 20등으로 오르더니 다시 40등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학생의 어머니는 나에게 그만둘 것을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나는 “그만 두겠다”라고하고 “그러나 내일모레면 이달 성적이 나오니 그것을 보고 짐을 옮기겠다”라는 단서를 달았다. 성적은 10등이었다. 나는 ‘불명예는 회복했다’라는 생각에 짐을 싸고 다시 명륜동으로 돌아왔다. 명륜동 성대 캠퍼스 밖에 성대 소유의 테니스장이 있었는데, 테니스장 뒤에는 군대 막사처럼 생긴 콘세트가 있었다. 이 콘세트는 학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의 모임인 ‘근로 장학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는데, 마침 콘세트 막사에 방이 하나 비게 되었다. 비록 방세를 내지 않는 공짜 방이지만 처음으로 내가 가져보는 전용 공간이 생긴 것이었다. 1974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히는 추위 속에서 나는 고등학교 1학 때 가졌던 꿈을 다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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