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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야기|난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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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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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든지 약평하지 마시오.
누구에게든지 그의 장점을 말해 주시오.
-벤자민 프랭클린-



합격 후 나는 행정사무관으로 1979년 11월부터 경제기획원에서 수습했고 1980년 7월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에 발령을 받았다. 몇날 지나서 입대영정이 날아왔다. 사실 고시 합격자는 장교로 군대에 갈 수 있었다. 또 약간의 힘만 쓰면 방위로도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병으로 군 생활을 하기로 하고 논산훈련소로 향했다. 졸병생활을 지원한 이유를 남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컸지만 그래도 부모를 잘 만나 대학까지 나오고 더구나 고시까지 합격했으니 대접받고 살아온 셈이다. 이제 군대생활에서는 다시 ‘대접받지 않는 삶을 살아보자!라는 생각이들었다. 광주 고속버스터미널 앞 이발소에서 머리를 깍고 논산으로 향했다.
나이 먹어 군대 가는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어머니는 계속 눈물을 흘리시며 고속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셨다. 논산훈련소에서는 26연대에 투입되어 예닐곱 살 아래의 아우뻘 되는 전우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기합받고 사격하고 구보하며 지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상관들의 호된 기합을 감수해야만 했다. 훈련을 마친 뒤 붙여 준 이등병 계급장이 5만 촉광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8명이 더블백을 메고 자대에 배치되었다. 우리 8명의 군번을 부르더니 ‘육사’라고 말해 우리는 모두 6사단에 배치되는 줄 알았는데, 간 곳은 태릉이었고 육군사관학교 사병으로 배치되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도련님이라면 사병들은 도련님을 위한 머슴들이었다. 그 중 이등병은 머슴들의 머슴이었다. 나는 ‘섬기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남은 섬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지 알았다. 육사생도들을 지도하는 말 중에 철저히 복종할 수 없는 사람은 남은 복종케 할 수도 없다. 라는 말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나는 군대에서 틈틈이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했다. 보초 설 때 영어회화를 해보고 일본어 단어를 외웠다. 또 영어를 잘하는, 두 달 후임병을 만나 영어에 큰 보탬이 되었다.
인생을 만남이라고 하던가. 점차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고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군대에서는 많은 배움을 얻었다. 대입 예비고사에서 남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대한민국 정부의 엘리트 부서인 경제기획원에서 사무관으로 일했으니 내가 잘난 줄로 알았는데, 군대에서는 이등병이 제일 바보였다. 같은 이등병 중에서도 나보다 못 배운 사람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이 있었다. 나 자신이 특별이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모든사람은 나름대로 재능을 갖고 태어났구나. 하는 깨달음과 회개를 하게 되었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지면 나는 곧 무너진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것이다. 그후 나는 어떠한 일에도 늘 최선을 다했다.

상병에서 막 병장으로 진급했을 때 일이다. 주번하사 완장을 차조 중대장실에 있는데 신참 상병 몇 사람이 들어오더니 “일들병들이 군기가 빠져 있으니 오늘 저녁 훈련을 시켜야 하겠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다. 나는 기합을 주는 것은 좋은데 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큰 비명이 났다. 일병을 집중적으로 구타한 것이다. 급기야 기절했다.
이 보고를 받고 나는 무척 황했다. 나를 포함한 상병들은 모두 군대 교도소인 남한산성을 갈것이고, 형을 살고 다시 자대로 돌아와 나머지 의무 복무기간까지 수년이 걸릴 것이다. 또한 전과자가 되어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복직할 수 없게 되어 인생을 망친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났다.
나는 부대 내에 비상을 걸어 구타사실이 밖에 알려지지 않도록 보안을 유지케했다. 그리고 한의학과에 다니다 군에 온 졸병에게 침을 놓고 지압을 하는 등 치료를 하게 했다.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나님! 신 일병을 살려 주십시오” 사실 그 당시 신 일병이 살아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었다. 새벽 두세 시쯤 되어 하얗던 신 일병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났다. 그는 말했다
“송 병장님,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어요?나는 기쁨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졸병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상관으로서 떳떳하게 행동했다는 뿌듯함이 가습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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