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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란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의 꿈과 희망을 갖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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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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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의 합계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절실하게 희망해 왔는가의 합계이다. -호세 카레라스-

근래 2010년 여수 엑스포 유치를 위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1992년 과장으로 승진해 대전엑스포 조직위원회에 파견됐던 경험이 있으므로 세계박람회의 의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처음 엑스포 조직위원회 해외유치부장으로 부임했다. 오 명 위원장이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송 부장, 대전엑스포에 43개 국이 참여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든 미국을 포함하여 100개국이 넘도록 하시오.”
애초 참여 대상 국가의 두 배반이나 넘는 수치로 참가국을 늘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해외유치부장으로서 보따리를 싸들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엑스포 조직위나 내 힘으로만 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외교부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교부에 공문을 보내 당시 본부에 와있었던 김석규 대사를 모셔와 같이 남미와 미국을 유치하려고 해외로 나갔다.

남미, 브라질부터 시작하여 볼리비아, 콜롬비아, 과테말라 등을 돌아다녔다. 이런 개발도상국들의 외무장관이나 통상장관을 만나 한국대전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참가할 경우 어떤 효과가 있고 무엇이 좋은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엑스포의 의미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김석규 대사와 브라질 대사관 직원들과 같이 관람한 삼바 춤은 가히 일품이었다. 김석규 대사께서는 “송 부장, 우리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에서 살자”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김석규 대사는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최초 외교관 3등 서기관 생활을 멕시코에서 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곧 잘했다.
볼리비아는 3,800m고지에 수도 라파즈(평화라는 뜻)가 있었다. 원주민은 키가 작고 피부색이 약간 까무잡잡했으나 지배 계급은 스페인계 서양인들이었다. 외무장관, 통상장관 등 관계 정부당국자들에게 엑스포를 설명하고 안데스산맥 꼭대기 4,000m 고지에 있는 바다와 같이 넓은 띠까 호수를 관광하였다. 하늘과 맞닿은 이 고원지대에는 원주민의 전근대적인 마을이 있는가 하면 골프장도 있었다. 공항에서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 올라갈 필요가 있을 까? 그대로 가면 바로 창공이었다.

콜롬비아에는 평소에 잘 아는 친구 권태면 참사관이 그 곳에 있었다. 커피, 에메랄드, 마약이 유명한 나라이다. 반정부 게릴라들이 많아서 자동소총을 든 두 경호원이 나의 좌우에서 경호했다. 정부요인들을 만나 엑스포 참가 권유를 했다. 과테말라에서는 장관뿐 아니라 부통령까지 만나 엑스포에 관한 설명과 참가를 권유했었다.
이제 중. 남미 유치를 마치고 뉴욕으로 향했다. 그 후 대사는 귀국길에 오르고 나는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 공보처를 찾았다. 클린턴 정부는 중진국인 한국에서 열리는 대전엑스포에 참여할 의사는 물론 예산도 없었다. 더군다나 정기적으로 열리는 등록박람회가 아니고 특별히 인정해준 박람회이니 만큼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마저도 없었다. 이런 미국을 무슨 수로 참가하게 할까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난관 끝에 미국을 설득하여 성조기를 대전엑스포장에 꽂았다. 그래서 사실상 반쪽 엑스포가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미국 유치에 가속도가 붙어 110여 개 국이 엑스포에 참가하게 하였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자 오 명 위원장은 곧 나를 홍보부장으로 발령했다. 그리고 또 다른 특명을 내렸다.
“송 부장, 이제 110여 개국의 나라가 엑스포에 오니 이번에는 관람 객수가 1,000만 명을 넘도록 하시오” 나는 최선을 다해 관람객 유치에 힘썼다. -다음 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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