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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복음화|공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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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성만 본부장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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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통치 철학이라 생각 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 했다. 부모 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는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의 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는 조선 왕실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부재와 대화부재를 낳은 가부장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 여성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의식, 스승의 권위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의 문제점 들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 삶의 공간에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들이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지금은 중국의 산동성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 479년으로 자니 중니 이름은 구이고 공자의 자는 존칭이다.
중국은 “잠자는 사자”라고 한때 나폴레옹이 서구의 경고망동을 두고 한 경고의 말이었다. 그러나 1842년의 아편전쟁은 서구와 중국을 모두 놀라게 했다. 중국은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별 볼일 없는 종이호랑이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서구의 놀라움과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편전쟁의 전장이 바로 후먼(호랑이 문)이라는 해변이었고 중국이 그 모래사장에서 대패했다는 점이다. 중국 역시 천자의 위엄이 총과 대포 앞에서는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크게 당황하고 있을 때, 홍콩, 상하이, 베이징이 순식간에 서양 귀신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1910년대 초 유교에 대한 맹포격을 퍼부으면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식인을 대표 하던 후쓰는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할 것인가 라는 글을 통해 유교의 폐해를 조목조목 열가한 후 마침내 완전한 서양화를 주장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유교는 사람을 잡아먹는 것 이라는 공감대를 확산시키며 중국 사회가 새로운 선택을 하도록 몰아갔다. 이런 와중에서 천두씨유 같은 인물을 통해 엉뚱하게도 공산주의의 씨가 뿌려지는 잘못된 선택을 낳기도 했다. 공산주의는 유교사상의 자라나는 싹을 잘라 버렸다.

잠재되어 있는 유교의 영향을 뿌리 뽑기 위하여 1966년 마오쩌뚱에 의해 시작된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이 유교를 공격 목표로 한 것이 기에 중국인들의 유교에 대한 피해의식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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