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정

문화이야기 분류

문화이야기 | 궁정(宮庭)문화와 노블리스 오블리주 (2)

작성자 정보

  • 추태화 교수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궁정문화의 산실은 바로 성이었다. 성은 기능이 다양했다. 성에서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문화, 교육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다. 물론 성에서 침략과 전쟁에 관한 음모가 끊임없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성은 갖고 있었다. 이 의미는 성의 주인, 즉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유럽의 각 도시는 귀족, 봉건 제후들의 성으로 즐비하다. 지금은 거의 박물관, 전시관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성은 각 시대마다 귀족들이 사회문제와 얼마나 깊이 관여하여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한다. 예를 들면 베를린은 프로이센 왕가의 성과 궁정이 베를린 시를 장식하고 있다. 뮌헨의 경우는 루드비히 왕가의 성과 궁정이 역시 시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다. 체코 프라하는 칼 대제의 역사가,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깊숙이 새겨져 있다. 메트로폴리스로 위용을 자랑하는 파리, 런던은 더 설명할 필요 없이 이들의 유적이 실제로 이들 국가의 왕족과 귀족의 역사인 셈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성을 찾아보기 힘들까 하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의 성은 서울에만 집중되어있고 지방에는 보기 힘들다. 특히 귀족의 독자적인 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과연 귀족이 존재하기나 했었는가. 귀족으로 존경받는 지방 토호세력, 이름 있는 가문은 언제고 중앙 왕정에 의해 제거당하기 일수였다. 반역이라는 죄명에 귀족의 씨가 남아나지 못했다. 지방 귀족이라면 관아의 관리들 정도였다. 독립적 의미의 귀족이 존재하고 그들에 의해 성이 세워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겪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적 무질서는 바로 보편화된 귀족문화가 없었다는 증거는 아닌가. 우리에게 성이 없다는 것은 귀족적 가치관이 일찌감치 말살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 왕권만이 모든 것을 독점한 폐해가 지금의 혼란에까지 이른 것이라 본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