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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교수의 영화 이야기 - 물신(物神) 사회에서 정의롭게 살기 - <돈> (2019, 박누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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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은 돈일 뿐이다.

 영화 의 주제는 돈이다. 돈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다. 돈 없이 살아갈 수 없기에 돈은 누구나 벌고 싶어한다. 돈은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가. 돈은 그야말로 생활이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가 아니던가. 돈은 그런 면에서 선악의 경지를 넘어서 있으면서도, 선악의 경계에 서 있다. 돈은 나쁘지 않다. 돈은 돈일 뿐이다.

 영화는 한국 금융의 중심 여의도 증권가를 비춘다. 하늘 찌르듯 솟아있는 마천루 빌딩은 활기찬 이들로 가득하다. 금융인들이다. 하루에 수십조 원이 거래되는, 그 거래로 울고 웃는 증권가. 주식브로커로 여의도에 입성한 조일현(류준열 )은 신입 직원이다. 그 위로 대리, 과장, 부장, 본부장. 어마어마한 경력의 선배들이 즐비하다.

 

 돈과의 악마적 거래

 금융가의 돈거래, 처음에는 선악의 저편에 있었다. 그러나 선임 과장의 유혹에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그의 제안은 그야말로 선악을 넘어서는 선택을 요구했다. 한번의 투자로 벌어들이는 돈은 일현이 받는 봉급에 수백 배, 수천 배에 이르른다. 제대로 한번 걸리면 고급 자동차는 물론 아파트도 살 수 있는 기회였다. , 이 착한 증권계 신입생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그가 처음 이 세계에 들어온 이유는 바로 부자가 되고 싶었다.”였다. 부자는 되고 싶은데 평범하게 벌어서 부자 되겠어?” 보통 사람들이 윤리 도덕 원리 원칙 다 지키며 살아간다면 돈은 어느 세월에 벌겠는가. 특단의 방법이 필요했다. 일현은 그 세계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한 발자국 더 들어가면 그것은 악마와의 결탁을 의미했다돈이 있으면 메이저, 돈이 없으면 마이너. 다윈(Darwin)식 적자생존 이론이다. 강자가 승자이고, 승자가 곧 강자다. 이익을 챙기는데 선악의 구분이 없다. 하이에나처럼 먹잇감만 챙기면 된다.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을 갖고 있으면서 왜 그리도 욕심을 내는가? 메이저들은 이렇게 답한다. “재미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깨끗한 돈놀이는 불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하면 깨끗한 돈벌이가 가능할까? 청부(靑富)는 어떻게 가능한가? 애초 이 고민에서 시작했다면 비극의 악순환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악의 경계를 넘어선 돈놀이는 이미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Faust)의 치명적 악수(握手)가 되었다. 즉 생명을 내건 계약이 된 것이다. 악마에게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욕망을 채우려했던 파우스트 박사. 파멸에 떨어졌던 파우스트처럼 불법을 자행하면서 돈놀이에 뛰어든 이들에게 댓가는 혹독하지 않을 수 없다.

 

 물신(物神)과의 전쟁

 어두운 양심과 못된 손들이 작업하는 지하 금융계, 지하세계에서는 쉬지 않고 은밀한 작업이 계속 된다. 빛과 어둠으로 나뉜 세계는 전혀 다른 원칙과 방법으로 돌아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양심과 정의에 기반한 직업윤리이다. 정직하게 일하고 정직하게 번다. 이게 빛의 세계에 있는 금융계이다. 그런데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는 속담이 왜곡되는 세계가 있다. 악마같이 벌어서 졸부처럼 산다! 그렇게 벌어서 언제 부자되겠어! 돈놀이 재미있잖아, 한번 눈감고 클릭해 주면 월급 수백 배도 벌 수 있는데 뭐 그렇게 쪼잔하게 살어.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달콤하게 들린다. 너무 매력적이어서 떨쳐버리기 힘들다. 물신이 어느새 영혼에 또아리를 틀고 옥죄어 온다. 어느새 돈의 노예가 되어간다.

 

 돈이 우상이 되게하지 말라

 경악스런 사실은 돈은 물질이지만 사람이 섬길 수 있는 대상, 즉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런 희구이다. 그러나 이 바램이 욕망이 되고 욕망의 욕망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면 돈을 섬기게 된다.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된다. 돈이 주인이 된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6:21) 돈은 사람을 몰락에 떨어지게 지배하는 물신이 된다. 황금만능주의(Mammonism)의 영 즉 사탄이다현대 사회는 경제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성경은 끊임없이 청빈과 절제를 가르치고 있으나 사회는 그렇지 않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13:5)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고전의 가르침도 우습게 여겨진다. 청교도적 가치관은 점점 잊혀진다.. 오히려 돈을 섬기려는 경향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잠언에 많은 말씀들은 돈을 경계한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10:2)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13:11)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14:24)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21:6)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27:24)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28:22)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5:13)

 돈은 돈일 뿐이다. 돈은 선악의 저편에 있는 물질이다. 비록 돈으로 생활이 윤택해지고 행복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재물이 영혼의 영역에서 활개치게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돈은 언젠가 우상으로 돌변하여 사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런 물신의 시대에 들어와 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고 경고한다.(딤후 3:2) 예수님의 경책을 다시 새겨 성경적 물질관으로 살아가야 할 때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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