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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교수의 문화이야기 - 7월의 ‘청포도’ 영성 - 육사의 시어에서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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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1.

7월 중순, 무더위와 폭염이 기승이란다. 그런데 한여름이니 당연하지 아니한가. 여름에야 당연히 장마도 오고, 태풍도 따라오고, 그 다음에 무더위는 자연의 순리. 그러니 무더위는 무조건 무조건이야... 올 것이 온 것이다. 호들갑 떨지 말 일이다.

우리 조상님들은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였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워야 몸도 건강하고 병충해도 적고 농사도 잘 된다.’ 여름에 땀을 흘려야 건강하다는 자연건강법이다. 공연히 돈 내고 불한증막 들어갈 필요 없이 그냥 땀 흘리면 된다. 얼마나 자연친화적 건강 유지인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섭리에 따르면 된다.

 

2.

7월이면 으레 그 시가 떠오른다. 이육사(李陸史)<청포도>. 고등학교 시절 처음 읽은 작품으로 기억된다. 작가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점령당하고 있던 시절, 의연히 일어나 민족 독립을 위해 몸 바치신 선열 중 한 분이시다. 이 청포도는 서정시로서 순수한 마음의 흐름을 노래한다. 아름다운 시다. 그런데 의아스런 부분이 있다.

온몸을 불사르며 민족 독립과 해방에 투신하신 분이 어떻게 이런 가녀린 정서가 담긴 글을 쓰셨는가. 상상컨대 대륙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열정을 쏟으신 분이라면 칼과 창 같은 단어나 목숨 걸고 항거에 나서는 의연한 결기가 뿜어져 나올 만한데, 더구나 이국땅 베이징 일본치하 감옥에서 목숨을 바치시지 않았는가. 꿈에 그리던 해방도 못 보시고. 그런데 청포도라니. 청포도는 독립투사에게 걸맞지 않는 표현 같아 보였다. 청포도 가지고 무슨 투쟁을 할 수 있겠는가. 최소한 물맷돌이나 죽창 정도는 노래해야 하지 않았을까.

 

3.

대학 졸업반 시절인지, 이효석에 관한 어느 평론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문장은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논조는 민족주의, 민족문학론, 유물론, 실천문학, 참여문학, 저항정신 등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일제라는 폭압 정권 아래서 어떻게 낙엽을 태우면서같은 낭만적 수필을 쓰느냐라며 핏대를 세웠다. 그는 이런 나약한 정신이 독립을 방해하는 감성이라고 비판했다. 이 글을 읽다보니 공감이 갔다. 이런 나약한 지식인의 썩어빠진낙서 같은 글이 교과서에 실리니 학생들이 뭘 배우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리가 있어 보이는 평론에 그만 설득 당했는지, 당시 이육사의 청포도가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족 투사라는 양반이 자신이 몸으로 저항하면서도 청포도 타령이나 하다니. 청포도는 보기도 싫다. 크고 달기만 한 샤인머스켓 같은 포도는 저리 가라. 그런 환각에 흐느적거린 때가 있었다.

 

4.

하지만 이육사를 다시 만나고부터 청포도는 달라졌다. 육사선생을 깊이 알게 되면서 청포도의 실체가 드러났다. 청포도의 계시라고나 할까. 무더운 여름날, 지인을 만나러 안동을 간 적이 있다. 안동은 정말 전통문화의 고장임에 틀림없다. 하회마을도 그렇고, 도산서원도 그랬다. 하회에서는 흥이 절로 났고, 도산에서는 유학의 깊은 이치가 풍겨졌다. 시내를 벗어나 차를 몰고 가다 문득 멈추게 되었다. 가로수 한 켠에 눈을 의심케 하는 팻말이 언뜻 보였다. 뒤로 돌아가 글자를 유심히 읽었다.

이육사문학관”! 아니 안동 한구석에 이 양반 기념관이 있다니. 이럴 수가. 무슨 연관인가. 그때까지 육사선생의 고향을 알고 있지 못했다. 혹 어느 독지가가 여기다 문학관을 건립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 추측을 하는 정도. 그런데 안동이 바로 이육사 시인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

 

5.

안동에서 다시 만난 이육사, 그리고 여러 시들, 그 중에 청포도. 청포도가 새로이 다가왔다.

이 시는 예언자적 상상력(Prophetic Imagination)으로 그려졌다. 결코 연약한 감상(感傷)적 정취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일제의 폭정에 고개 숙여 공연히 자연을 노래한답시고 산속에 숨어버리거나 한탄과 퇴행을 반복하는 그런 문학. 그것은 치졸한 문학질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작가는 교활한 글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친일문학, 어용문학으로 지칭되는 이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이태리 행동주의 작가 G.망가넬리의 말을 상기해 본다. “세상에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가 있는 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이 절규가 이렇게 들리기도 한다. “세상에 빼앗긴 나라에 살면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육사선생은 당대의 패배의식을 박차고 분연히 일어났다. 문학이 감성팔이나 체제순응적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을 찾고, 나라를 찾는 일은 본래 같은 일이다. 문학은 자아와 국가를 분리하지 않는다. 동시에 회복케 해야 한다. 그의 고뇌는 오래전 생육신, 사육신의 고통과 맥이 닿는다. 불의한 군주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리더는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손에 넣었고, 조정과 신하들은 둘로 쪼개져 헛된 논쟁만 일삼고, 백성은 이유를 모른 채 도탄에 빠져 간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의 이름으로 알량한 자기변명이나 할 수는 없다. 문학은 진리와 진실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드러내야 한다. 시인에게 타협이란 오명이다. 한낱 물고기도 살기 위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시인이 어찌 시대를 거슬러 올라 횃불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인은 한계를 넘어서는 자이다. 누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야한다. 발이 부르트고 몸이 상해도 그 길을 가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문학은 모두 죄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6.

육사의 고뇌는 이러했다. 어떻게 이 총체적 불의(不義)를 넘어설 것인가. 넘어섬으로의 초월(Transcendence)은 단지 경계를 넘어가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현실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초월이 이론적, 명상적인 데 머문다면 그것은 허공을 울리는 꽹과리이며 효험 없는 공염불이다. 초월에는 책임 있는 행동, 변혁하는 실행이 함께 해야 한다. 철저하고 처절한 길일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초월이다. 초월은 시인의 사명이자 운명이다. 그래서 시인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 <>). 시인은 꺾이지 않는 풀이며 꺼지지 않는 촛불이다. 온갖 더러운 욕망과 야심으로 혼탁해진 세상을 맑게 하는 샘이다

 * 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연, 서울에 돌아와 신문사 기자로 일한 생애, 투옥을 겁내지 않고 항거하며 써내려간 육필(肉筆)이 곧 독립투쟁이었던 것이다. 또한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이었다. 빼앗길 들에서 봄(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을 기다리는 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항 작가의 냉철한 존재론이기도 했다.

그의 문학 정신은 시대와 권력에 타협하거나 아부하지 않는 꼿꼿한 선비를 닮았다. 도산서원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선비의 서가에 친구처럼 서 있는 대나무의 올곧음을 익혔으리라. 안동 세도가의 권위의식은 그에게 애초에 없었다. 시인 이육사는 대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 올라 시상(詩想)의 손길을 뻗는다. 그 위로 예언자적 상상력이 내리는 것이다.

 

7.

청포도는 예언자적 상상력 (Prophetic Imagination)으로 감싸여 있다. 군사훈련을 받아 무장투쟁을 할 법도 한 이가 시인으로 변신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간파하여 붓을 든다. 그의 내면은 온통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꿈으로 가득하다. 7월 열기에 숨은 턱턱 막히지만 포도나무에 송이송이 달린 열매는 햇살을 머금으며 탐스럽게 익어간다. 시인은 빼앗긴 들이지만 우리 농부가 풍성하게 일궈놓은 포도밭 한 가운데서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햇살이 따가울수록 포도는 탐스럽게 익어간다. 포도 알 하나하나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민초(民草)들의 애환, 사연이 깃들어 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수액 한 움큼 속에 이 하늘 밑에 몸 붙여 사는 백성들의 땀과 피, 숨결이 배어있다. 분노와 자유에의 의지가 들어있다. 그들의 웃음과 울음이 포도 한 알 한 알에 맺혀있다. 시인이 아니면 누가 이 비의(秘意)를 느낄 수 있으랴. 포도송이는 사람들의 마을과 그 위에 펼쳐진 광대한 하늘이 시여(施輿)한 선물이다.

빼앗긴 땅에서도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내 땅인데도 남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믿기지 않지만 현실은 엄연하다. 이 부인할 수 없는 비극 앞에 포도가 열매를 맺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말라 비틀어져야 정상이 아닐까. 스스로 목을 베거나 자결하거나, 그게 나라 잃은 설움에 대한 충정의 표출 아닐까. 서러움과 분노로 피를 토하고 거꾸러져야 정상 아닐까. 어쩌자고 살아있어서 열매를 맺는단 말인가. 이 과실은 치욕의 산물이 아닐까. 외세의 굴욕 아래서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8.

이 과실나무는 꼿꼿하지 못하다. 늠름한 자태도 아니다.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재목으로 쓸 만하지도 못하다. 큰 기와집에 기둥감은 더구나 아니다. 그저 군불에 땔감으로 던져질만한 못생긴 허드렛 토막이리라. 신기하게도 이 나무는 선산의 굽은 나무처럼 보인다. 선산을 지키는 나무는 곧게 잘 생긴 나무라야 한다. 조상님 묘소를 지키는 나무는 당연히 그런 나무여야 한다. 하지만 못난 후손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선산 나무를 목수에게 팔아넘긴다. 하나 둘 그렇게 베어진 나무는 남의 집 들보나 서까래가 되기도 하고 잘 나면 기둥이 되어간다. 왜 우리 고향 선산의 나무들이 남의 집, 그것도 원수의 집 목재로 팔려가야 하는가. 잘난 놈들은 제 잘난 맛에 다 떠나고 못난 놈들만 남은 형국. 잘난 놈들은 외세에 아부하고 야합하고 육신의 안일을 얻어 희희낙락 하고 있다. 결국 선산을 지키는 나무는 못생긴 녀석들이다. 바보 같은 녀석들이다. 민초가 그렇다. 재목으로 쓸 수 없게 생긴 구부정한 나무들이 조상님 유산과 역사를 지킨다는 뜻이다. 바보가 선산을 지킨다. 포도나무가 그렇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이 나무가 실은 열매를 맺는 나무였다는 사실, 그게 역설적 반전이다(Paradoxical Meaning).

 

9.

이 장면에서 우리 주님이 떠오른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5). 나사렛 예수는 자신을 백향목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백향목은 보기에 얼마나 멋진가. 성전을 짓는데 적합한 나무다. 키가 크고 잘 생긴 그런 나무가 아니라신다. 성막에 쓰이는 값진 싯딤나무도 아니라 하신다. 그저 구부러지고 휘어진 포도나무에 빗대시니 묘한 생각이 든다. 하기야 예수님은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셨다. 왜 위풍당당한 종마(種馬)를 타지 않았을까. 제자들이 돈이 없어서 마련하지 못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로마군이 말을 모두 전쟁에 약탈해 씨가 말랐을까.

예언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뜻밖에도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보인다. 누가 이런 극적 연출을 시도하려 했는지. 백성들의 영웅으로 대접 받으며 예루살렘 성에 올라오는 주인공이 나귀를 타시다니. 그것도 어린 새끼나귀를. 모두가 배꼽 잡고 웃지 않았을까. 더구나 아랫것들을 벌레 취급하던 지배 계층에게는 더했으리라. 저게 유대인의 왕이래, 꼴이 우습지 않는가! 무장도 하지 않고, 뒤뚱거리는 나귀새끼를 타다니. 바보! 바보! 바보! 이런 비웃음 저편에 왕이 오신다! 왕이 오신다! 외치는 소리 또한 들려온다.

그 가운데 등장하신 예수는 고달픈 몸이다. 고달프다.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마을 저 동네 다니기를 그치지 않았다. 약한 자,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나면서 불구가 되어 살아온 자,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 모두는 예수의 사람들이었다. 백성이나 이웃이라고 부르기에 너무 가까운 곧 자기 자신이었다. 예수에게 사람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14:20) 일심동체, 혼연일체였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려고 오신 그 분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다(20:28).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분이 진정한 메시아이시다. 육신은 고달프셨다. 고달픈 몸을 마다 않고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다.


10.

시인은 아직 고독하다. 나라를 잃은 아픔에서 자신을 위로하기도 부끄럽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윤동주, <서시>). 애초에 시인이 아니었다면 아픔도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시인은 이 경우 천형(天刑)에 가깝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밝히기에 지상에 보내진 불꽃이다. 포도나무 앞에 선 시인은 홀로 서 있지만 외롭지 않다. 그는 누구를 기다린다. 그 누구는 누구실까. 그 기다림 속에서 현실은 새로운 용기로 채워진다.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좌절이냐 현실 안주냐, 아니면 극복이냐 현실 타파냐, 결단의 촌각 앞에 서있는 자신을 본다. 넘어서자, 넘어서 앞으로 가자!

내게 용기를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오고 있는 한 우리는 할 수 있다. 넘어설 수 있다. 이 기다림 속에서 초월의 문이 열린다. 현실은 비참하지만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치욕스럽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현실은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양식으로 채워진다. 하늘을 꿈꾸는 자만이 현실을 넘어선다. 초월의 다음 문이 열린다. 현실은 하늘의 꿈과 연결되고 승화된다. 현실은 하늘의 힘으로 극복해야할 그 무엇이다. 역동적 초월이 작동한다(Dynamic Transcendence).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내가 바라는 손님은 누구일까. 시인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누구는 이라 연상케 했다. 그 님은 진정 누구일까. 그 님이 구원자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님이 오셔서 나라를 되찾게 하고, 자유와 해방이 거리에 넘쳐나고, 환한 웃음과 어깨동무가 뜨겁게 교환되고, 게다가 배불리 먹고, 편히 잠자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메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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