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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교수의 문화 읽기 - 미군 철수와 한국 기독교의 도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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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기상도”, 점검과 대비를 철저히 해야 

 

 1. 2021. 8월 아프가니스탄

 해외 긴급 속보가 날아들었다. 큰 제목은 미군 철수”, 그 밑에 아프가니스탄에서라고 되어있다. 속보이긴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지난 트럼프 대통령 시절 탈레반과의 협정(2020.2)에 이미 조인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심상치 않은 내용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철군을 명령하고 바로 실행에 들어간 것이다. 문제는 탈레반이 수도 카불까지 손쉽게 점령지를 넓혀간다니 이 무슨 경악스런 소식인가. 그러는 과정에서 정부군은 도망가거나 항복하는 등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도 카불이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다는 전보는 며칠 채 지나지 않아 들려왔다.

 

공항에는 외국인들 외에도 수많은 아프간 시민들이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비행기 트랩에 올라가기도 하고, 심지어 이륙 중인 비행기에 올라타려는 풍경이 안타까웠다. 탈레반에 나라를 점령당한 결과가 이토록 참담한 일을 가져올 줄은. 어떤 이는 이륙한 비행기에서 떨어졌다는 보도도 있었으니 생지옥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20년 동안 지속된 국가 재건(Nation Rebuilding)은 일단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강경파 탈레반이 정권을 접수하기 직전인 시각이 다가왔다. 북부 지방에서 항전(抗戰)이 알려지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의 생활은 과거로의 복귀가 의심없이 받아들여진다. 특히 여성과 아이들 인권에 심각한 타격이 있을 것이다. 과거 탈레반 치하에서 여성과 아이들은 교육에서 배제되고, 여성은 부르카를 필수 착용해야 하는 그들만의 전통이 다시 강요되었지 않았는가. 부르카 가격이 상고가를 향한다고 한다. 탈레반 출발이 이슬람 신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슬람의 본색을 의심하게 한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 탄압.

 

 2. “미군 철수라는 다원적 의미

 외국 군대는 철수해야 한다.” 이 논리는 명제로서 옳은 말이다. 왜 남의 나라 군대가 자국이 아닌 나라에 주둔하고 가공할 무기들을 탑재하고 어떤 적을 향해 군사 작전을 도모하는가. 무슨 권리로 남의 나라에 치외법권 지역을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외국 군대 주둔은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구한말, 쇄국정책 끝에 열강의 각축장이 되지 않았는가. 이 땅에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군대가 들어오면서 갈등이 야기되었고, 청일 전쟁(1894), 러일전쟁(1904)이 일어나고, 일본은 국모 시해 사건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처절한 역사의 흔적들이다. 외국 군대가 한반도 및 그 주변에서 일으킨 전쟁은 일차적으로 약육강식, 열강 패권 경쟁에 그 원인이 있으나, 이차적으로 이런 질문이 고개를 든다. 과연 우리는 급변하는 세계 변화 앞에서 어떤 준비했어야 했는가. 도도하고 준엄한 역사의 도전(cf. Toynbee)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패착은 부인할 수 없다. 구한말 대한제국은 그렇게 외세에 문을 내주어야 했다.

 

 역사는 뚜렷이 기억하게 한다. 베트남의 경우에도 미군 철수가 있었다. 지루하게 이어진 베트남 전쟁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희생의 장으로 내몰았는가. 그 반성과 결산은 또 다른 문제로 남는다.). 그 끝말인 1975. 호치민의 공산군이 남하하고 사이공이 함락되던 때 미국은 평화협정을 맺는다. 표현이 평화협정이지 미국 입장에서는 안전한 철군을 확보하려는 굴욕의 협정 아니었나. 그 결과 미군은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 몰라도 남쪽 베트남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수많은 시민들이 베트남을 떠나려는 탈출 러시가 벌어졌다. 비행기를 못 탄 이들이 바다로 몸을 던진 것이다. 보트피플(Boat People)로 불리었다.

 

 이 목숨을 건 탈출 러시는 그후 캄보디아에서도 재연되었다. 미군 철수와 함께 무너진 남베트남 정권은 곧 바로 옆나라 캄보디아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공산 게릴라 세력의 수장 폴 포트는 수많은 자국 양민을 학살하여 킬링 필드(Killing Field)라 불리는 비극을 일으켰다. 그들은 처음에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았으나 자국 시민들 중에 반역자로 지목한 이들을 무차별 살해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 수는 백만 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바다가 없는 관계로 보트 피플은 없지만 인도, 파키스탄 등 국경 지역에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있다는 보도가 끊이지 않는다. 국제 정치가 다급하게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친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미군 철수가 이뤄진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 것인가? 우리나라 현 상황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목소리를 높인다. 미군 철수는 안된다는 주장의 보수 진영과 미군 철수는 당연하다는 진보 진영. 개인적 의견으로 진보 진영에서도 미군 철수는 (지금은) 안된다는 의견을 갖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표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리하여 미군 철수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이들은 진영 논리를 빌자면 진보라기 보다는 친북 내지 종북 성향의 이들로 보인다.

 

 “외국군 철수는 합리적 논리다. 그러나 미군 철수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베트남에서 그랬고, 캄보디아에서도 그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현재 보는 바와 같다. 미군 철수는 주둔국 해당나라 뿐 아니라 국제 정세에 엄청난 파고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미국, 미군은 단순히 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군 주둔이 미국의 자국이기주의, 세계패권주의, 군수산업 확충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하지만, 미국 건국에 기반한 청교도 정신과 복음주의적 정치관은 아직도 세계 안에서 선한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의 기대는 미합중국이 부디 힘의 강국 미국”(米國)이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를 수행하는 미국”(美國)으로 그 아름답고 선한소명의 역할을 다하기 바라는 바이다.

 

 3. 트로이에서 카불까지

 미군 철수와 카불 함락, 이 시점에서 왠지 트로이 목마가 떠오른다.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트로이는 그리스의 공세를 훌륭하게 막아냈다. 전쟁은 지쳐가고 전의(戰意)는 시들어간다. 그때 목마(木馬)를 제안한다. 철도 아니고 동도 아니고 그저 나무조각으로 설기설기 기어만든 나무 조각의 말형상이었다. 트로이인을 위한 제물이라고 가짜뉴스를 더해 환심을 산다. 트로이인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트로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놓는다.

 

 누가 알았으랴 그 목마 안에 정예부대가 칼을 갈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누가 눈치 챘겠는가. 그 허접한 목마가 고도의 전술이었다는 것을. 비록 사기(詐欺) 전술이었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트로이 목마는 고도의 위장전술이었던 것이다. 트로이 함락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목마에 긴장을 푼 트로이는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역사는 증언해 왔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별 것 아닌 것에 나라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자그마치 수천 년 동안 경고하고 경고해 왔다. 그래서 확실한 교훈은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부연하자면 나라가 무너지지는 않은 사례이지만 중국과 미국의 외교 사이에 이름이 있었던 핑퐁 외교. 작은 탁구공에 빗대어 실행한 전략. 코카 콜라, 햄버거를 폐쇄적인 나라의 작은 도시까지 진출 시키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식 상술만이 아니라 그렇게하여 미국의 이미지를 변화 시켜보려는 감성(Emotion) 전략이다. 정치에서 때로는 이성을 앞세운 협상보다 감성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헐리우드 영화를 금지하고 제재 하는 것은 민심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증거일 터이다. 서구 영화를 타고 들어오는 자유로운 삶, 인권 해방, 일방향적 통치에 대한 저항 등이 두려운 것이다. 별 것 아닌 것같은 것들이 국가 시스템을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4. “평화 협정”, 그 이중성

 미군 철수를 가능하게 한 문서는 이른바 평화 협정이었다.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이 20202월에 탈레반과 조인한 문서에 미군 철수가 들어있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떠난다는 것이다. 바이든 미국 현 대통령은 철군을 명령했다. 정부 기관, 군수 물자 회수, 민간인 대피 등의 절차 없이 바로 군 철수를 감행하게 했다. 유비무환을 생각지 못했다탈레반은 파죽지세로 아프가니스탄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결국 수도 카불까지 들어왔다. 누군가 말했다. 무혈혁명이었다고. 그 과정에서 곳곳에서 정부 관리를 공개 처형하고, 여인들에게 부르카를 강요하고, 민간인을 구타하거나 살인까지 저질르는 상황이 유튜브 등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어느 보도는 탈레반 혁명군과 결혼시키기 위해 12세에서 성인에 이르는 여인들 명단을 작성한다는 것이다. (최근 성남시 공무원 사회에서 벌어진 미혼 여성 명단 작성은 우리나라가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자괴감마저 들게 한다.)

 

 평화 협정! 정말 좋은 단어이다. 전쟁하던 나라 간에 평화 협정을 한다면 더더욱 환영할 만한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평화야말로 인류가 염원하는 영원한 소망의 이데아(Idea)가 아닌가. 그런데 역사의 뒤편에는 종종 위장(僞裝)이라는 어둠이 서려있다. 위장 평화가 그것이다.

나치주의가 독일을 점령하고 있던 소위 나치 시대(Nazi Times). 히틀러는 입만 열면 평화를 언급했다. 예를 들면, ‘우리 독일인의 소명은 세계 평화입니다!’ ‘우리 게르만 제국이 원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우리는 세계에 평화를 건설할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 독일인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자랑스런 제3제국(나치주의자들이 부르던 독일명)은 결코 타민족을 침략하지 않습니다.!’ 등등이었다.

 

 5. 나치의 평화 협정, 그 함정과 경고

 이런 주장을 증명이라도 하듯 히틀러는 국가간 협정과 조약을 체결했다. 이탈리아 무소리니, 프랑스, 영국 쳄벌레인 수상, 소련의 스탈린 등과 친화정책을 벌렸다. 이들은 나치당 본부가 있던 뮌헨에 모여 뮌헨 협정”(1938)을 맺는다. 내용은 불가침평화조약이었다. 각국 속내는 달랐지만 전쟁하지 않는다는 데에 안심하였다.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쳄벌레인은 히틀러를 접견하고 나이스 하고 품격있는 지도자라고 평가했으며 독일은 전쟁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연히 의심하고 오해했다는 표현)’고 말했다. 영국인들은 수상의 발표를 그대로 믿고 믿었다. 독일은 영국을 결코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안심했다. 하지만 독일은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심혈을 기울여 전폭기, 미사일을 제작하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가짜 평화조약을 믿고 무방비한 상태에 있었다.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를 훌륭한 정치인으로 평가했던 쳄벌레인 수상, 그는 역사에 다시 속죄할 수 없는 오판을 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나치군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서서히 동쪽으로 진군하여 폴란드까지 위협하였다. 서쪽으로는 라인강을 넘어 프랑스 라인란트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서방의 파시즘 극우 세력과 우호 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나치군은 1939년에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발발시키고, 온 유럽을 전쟁의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와중이라 히틀러가 평화조약을 제안하자 스탈린은 대환영이었다. 1939823일 독소 불가침조약이 이뤄졌다.

 

 나치주의자들은 자국 독일을 합법적 수단(?)으로 장악하였다. 그들의 야욕은 결국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질렀다. 영국은 당혹하였다. 독일 전투기들이 삽시간에 영국 런던과 여러 도시들에 폭탄을 퍼부으며 전쟁을 시작했다. 오판의 수상 쳄벌레인은 처칠에게 수상직을 넘져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칠은 전쟁을 지휘하며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We'll never surrender!)라는 명연설로 영국의 재기를 이뤄갔다. 난세에 영웅이 등장한다고 하던가. 히틀러가 독일의 영웅으로 세계를 비극으로 몰아넣는 악의 축이라면 반면 처칠은 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착한 사람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나치 권력에 야합한 비시 정권이 등장하여 파리 개선문에 진군한 히틀러 군대에 하일 히틀러경례를 하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런 국민 저항이다. 레지스탕스 저항운동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오욕의 멍에를 지게 되었을 것이다.

 

 나치가 보여준 평화 협정의 허구성은 극명하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모두가 이 평화 협정 및 우호 전략에 속았고, 마지막 남은 것은 소련이었다. 스탈린은 독일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설마 여기까지.. 나폴레옹 군대도 모스크바를 함락하려는 욕망 때문에 결국 몰락하지 않았던가. 모스크바는 불멸의 성이다. 스탈린은 폴란드와 체코 국경으로 군대를 보냈지만 나치군에 대한 소극적 방어에 그쳤다. 히틀러 수상 (그는 이미 수상과 대통령 권한을 동시에 작동하는 총통’ Fuehrer의 직위를 만들고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이 평화 협정을 파기하겠느냐는 일말의 낭만적 상상을 하면서. 그러나 19416월 독일 나치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믿었던 평화 협정이 휴지 조각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히틀러가 국가 원수들에게 사인하자고 제안한 평화 협정은 처음부터 속임수요 거짓 선동이었는지 모른다나치주의자들이 말하는 진실은 오직 당론에 의한 욕망, 지배와 전쟁이 전제되어 있었다. 일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인하여 얻게 된 전쟁 패망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려는 국민적 열망은 나치에 의해 왜곡되었다. 국민의 애국주의(Patriotism, Nationalism)는 나치당이 세력을 확보하고 세계 지배라는 야욕을 이뤄가는 선동 전술(Propaganda)에 다름 아니었다. 국민들이 정신을 차릴 때는 이미 국가 권력이 나치당의 지배 아래 떨어진 뒤였다. 그들은 기다린 건 나치 탄압과 전쟁에 희생되는 과정이었다.

 

 모두가 속았다. 히틀러와 나치 당원, 그리고 그 휘하에 돌격대(SA), 친위대(SS), 게쉬타포 등으로 무장한 나치 권력은 폭력이었다. 나치에 저항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친나치 법정에 의해 반국가사범으로 구금되고 일부는 사형 선고를 받아 장렬한 마지막을 맞아야 했다. 나치의 정치 세력은 자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끝내 전쟁에 동원되어 희생양이 되게 했다. 모두가 평화 협정아래 숨겨진 포석이었다. 전략으로 하자면 이보다 더 효율적인 전술이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종이 한 장의 서약으로 그 패악한 거대한 음모를 숨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평화 협정의 논란에 서 있다. 더구나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를 통해 평화 협정에 대한 진의를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에 있다. 나치주의가 평화 협정을 빌미로 어떤 위장 전략을 감행했는지, 그 역사적 경고를 재삼 되새겨야 한다. 역사에서 만약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역사에서 오판(誤判)은 치명적이다.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몰고 올 수 있다. 그리하여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각 내각의 고위 관리들 등 국가 권력에 참여하는 이들은 오판을 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상황 판단과 국제 정세를 파악해야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고전 <징비록>(유성룡, 임진왜란 실상을 1599-1604 사이에 집필)이 이 시대에 부르짖는다. 역사에 비극을 반복하지 말라! 역사에 오판을 되풀이하지 말라! 이제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편에서 계속됨 / 6. 현대 상황과 기독교. 7. 한국 기독교와 하나님 나라추태화 소장 (이레문화연구소 / 전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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