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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 대강절에 생각나는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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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태화 교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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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대심문관”편에서 이런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어느 대심문관이 있었다. 그는 추기경으로 주님의 이름을 빌어 교회도 크게 짓고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주교 밑의 모든 이들은 그의 말에 절대 복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추기경이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했을까. 놀랍게도 그는 심문관이 되어 포로로 갇혀있던 예수님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떠나달라고 요청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교회와 도시를 잘 다스려왔으므로 이제 예수님이 굳이 나타나서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추기경의 교회는 예수의 말씀에서 이미 멀리 벗어나 있었다.

2009년도가 저물어간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2009년도를 한국교회사의 “중세 시대적 전환”이라고 명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교회에서 의로운 지적을 무시한 채 세습이라는 형태의 교권 이양이 이루어져왔고, (사회복지 활동을 기독교가 그나마 왕성히 하면서도)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현실문제에 교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난 대선 때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던 교계지도자들은 다 어디로 행차하셨단 말인가. 정치 어느 구석에서 기독교적 이념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고 2009년도가 저무는 막바지에 예수의 제자도를 생명으로 하던 대표적인 한 교회가 세계적 브랜드를 선언하며 이 무한경쟁에 뛰어들었다. 제자훈련을 가르치던 그 교회가 내린 결론이 천문학적 액수의 건물로 귀결되었다는 발표는 한국 교회에 엄습한 어둠을 감지하게 하였다. 교계에 일고 있는 자본주의적 무한경쟁을 경고할 기준은 이제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가야하는 교회가 이러하건데 과연 누가 공의와 사랑을 행동하라고 권면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 과연 교회의 권면과 경고를 받아들이겠는가. 소망의 주 예수님, 이번 대강절에 간절히 기도하옵기는 미혹의 영에서 저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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