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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 신비의 진정성을 회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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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태화 교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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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시간성을 띠고 있어서 흘러간다. 태초로부터 시작된 시간은 이제 종말을 향해 다가간다. 우리는 시간의 실체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시를 빌어 종종 표현한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것... 그렇다고 시간이 무작정 목표도 없이 그렇게 흘러만 가는 것일까. 시간은 역사의 실체를 통해서 현존을 일궈낸다. 우리는 초월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시에 그분의 구체적인 섭리의 세계인 현존 안에 살아간다. 인생이 신비한 것은 바로 초월성과 현존이라는 경계를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래서 생명들의 참 살 맛나는 현장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에 신비가 제대로 체험되고 있는가.

신비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비는 염세주의자들이 도망가는 어두운 동굴이 아니다. 신비는 무엇인가에 도취한 자들이 흐느적대는 수렁이 아니다. 신비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구원사에 보여진 하나님의 임재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문화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신비가 체험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신비가 신앙의 도그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가 의아스러울 때가 있다.

중세 시대에 성도들은 신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신비를 주술로 생각했다. 교회 안에 마술이 횡행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처럼 종교개혁가들도 교회를 정결케 하려 했다. 중세 교회 안에 마술적 요소가 스며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십자가도 마술을 부리는 도구라고 여겼다. 성인들의 유골도 영험하다고 믿었고, 성호를 긋는 행위도 주술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사제들은 마치 무당 같았고, 그들의 말을 의심할 경우 불안이 가중되었다. 신앙의 신비성이 종교적 히스테리로 뒤바뀐 것이다. 지금 우리는 중세 교인들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반문해본다. 문화에 안주하고, 문화에 만족하고, 문화의 마술에 지배당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문화는 오늘도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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