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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상여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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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성만 본부장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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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는 전통 상례에서 망자를 묘지까지 운반하는데 쓰인 도구다. 상여는 양택(집)에서 음택(무덤)으로 옮겨가는 음양의 중간적 집으로서 환생의 소망을 나타냈다. 상여 둘레에는 용 봉황 등의 장식과 사람 모양의 꼭두가 배치돼 망자의 영혼을 수호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주는 존재였다.

유교적 절재의 미를 추구했던 양반의 상여는 조촐했던 반면, 평민들은 오히려 화려하게 장식했다. 신분 때문에 살아서 누리지 못한 것을 마지막 가는 길엔 호사를 누렸다. 죽음 앞에서는 반상의 차별이 없었던 것이다. 평민의 상여에 임금의 표상인 용과 봉황이 화려하게 장식 된 것도 그래서다. 임금의 상여는 규모가 크되 단층으로 되었던 반면에 평민들은 규모가 작더라도 3층 4층으로 화려한 상여를 만들었다. 따라서 상여의 장식물인 꼭두는 자신들의 삶이나 생각을 문자로 남기지 않은 평민의 세계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지만 상여를 운구차가 대신하면서 전통의 상례문화는 붕괴 되었고 꼭두도 사라졌다.

현재 남아있는 꼭두는 주로 조선후기와 일제시대에 만든 것이다. 가장 오래된 것이 18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몇몇 수집가들이 차곡차곡 모아 박물관에서 꼭두를 만나게 하고 있다. 상여 꼭두 전문 박물관인 꼭두박물관(서울 대학로), 상여 꼭두를 포함한 목조각품을 보여주는 목인박물관(서울 종로구 견지동), 전통 상례문화를 테마로 한 쉼박물관(서울 종로구 홍지동) 등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목아박물관 등에서도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안내, 호위, 시중, 연희는 네 가지 기능의 사람 모양으로 꼭두를 동자와 동녀, 광대, 호위무사 등 세상의 온갖 인물형이 다 표현했다. 인물형 꼭두는 크게 네 가지 기능으로 나뉜다.

첫째 안내하기 망자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역할이다. 안내자 역할을 맡은 꼭두는 보통 용과 봉황 등 초인간적 존재와 더불어 나타난다. 둘째, 호위하기 망자가 나쁜 힘으로부터 침입 받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이다. 무기를 들고 있거나 위협적인 표정을 하고 있다. 고종의 장례 행렬에는 방상씨(눈이 네 개인 귀면)가 쓰인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조선시대에는 무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일제시대에는 경찰, 해방 후에는 총을 든 군인의 모습으로 바뀌는 등 시대상을 반영한다. 셋째, 시중들기 망자의 수발을 들어주는 역할이다. 얌전한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넷째, 즐겁게 하기 불안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하여 분위기 전환을 담당하는 꼭두는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거나 물구나무를 서서 연희를 벌이는 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 양반은 청노새를 타고 장군이나 당상관의 의관을 갖춘 모습의 망자를 상징한다.
* 저승사자는 저승의 심판관인 염라대왕의 명령에 따라 망자의 혼을 데리러 온 사자, 삶과 죽음의 매개자다. 냉혹한 존재이지만 망자가 선인일 경우 용서를 베풀기도 하는 융통성을 갖고 있다. 망자를 저승까지 잘 데려간다는 뜻으로 상여 맨 위 용마루에 꽂아 둔다.
* 시종은 망자의 시중을 드는 존재로 흔히 두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 동자는 어린 소년을 말하며, 불교에서는 20세 미만으로 출가했으나 삭발하지 않은 남자를 가리킨다. 세파에 물들지 않은 동자는 신성한 의미로서 망자에게 정성을 다 한다.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쌍 상투를 틀고 손은 가지런히 모아 망자에 대한 엄숙함과 공손함을 보여준다. 선녀와 동자는 도교사상에서 비롯된 길상이기도 하다.
* 색시는 이승에서의 중요한 순간인 결혼을 기억하라는 의미와 저승에서도 좋은 인연을 만나 백년해로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근대의 꼭두는 원삼이나 족두리를 착용하지 않고 호적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호적을 파서 시집을 간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승의 호적을 파 저승으로 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동방삭은 중국 한나라의 장군으로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흰얼굴에 흰머리와 수염을 달고 흰색 도포를 입었다. 장수를 상징한다. 망자가 저승에서 오래오래 잘 살라는 뜻에서 상여의 용마루에 얹는다.
* 재인은 재주를 부리며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들이다. 황천길의 무서움과 지루함을 덜어 주는 역할이다. 손태도는 상여의 악공, 광대 꼭두들에 대한 연구란 글에서 재인을 상세히 분석 했다. 조선시대에 유교식 주자가례에 의한 예법이 자리 잡기 이전에 우리 민족은 죽은 자를 더 좋은 세상에 보내겠다는 소망으로 장례 행렬에서도 음악을 연주했다.

숙종실록(32년)에는 어버이의 상을 보내는 자가 상여 앞에서 풍악을 크게 벌이니 금단하게 하소서 라는 기록이 있다. 사대부들은 규제를 따랐으나 평민들은 옛 풍습을 쉽게 버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근까지 경남 남해에서는 호상일 때는 꽹과리, 북, 장구, 징 등 농악기를 불고 두드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재인들은 농악대가 아니라 지방 감사나 수령의 행차에 동원된 악공의 차림을 하고 있다. 평민들은 자신들이 본 행차 중 가장 화려한 모습을 상여 꼭두로 표현한 것이다. 안동지방에서는 물구나무 선 광대 꼭두가 많이 보인다. 이는 과거급제자의 행차에 동원된 광대의 모습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재인은 죽음이 마냥 슬픈 일이 아니라 망자가 더 좋은 곳으로 가길 기원하는 우리민족의 정신세계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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