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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복음화|조선의 유교국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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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성만 본부장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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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성계가 유교 국가로 건국 할 수밖에 없었는가 역사적 배경을 통하여 알아보자. 그 당시는 불교가 장성하여 정국을 주도 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며 최근에 방영되는 사극 드라마를 통하여 명확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이성계를 도왔던 무학 대사는 왕사로 정사를 도모 했으니 당시불교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이성계의 왕위는 정통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혁명과 무력으로 피 흘려 쟁취한 것이므로 선비들이나 관료들은 인정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아울러 혁명의 칼바람에 공기는 싸늘해지고 숨쉬기조차 힘든 공포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전환하고 인자스럽고, 의리와 덕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로 각인시키기 위해 유교를 택했을 것이다.

둘째는 고려시대는 불교가 가장 장성한 시기였고, 많은 불교문화가 꽃피워 지기도 했으나 고려 말기에는 갈수록 불교의 타락이 극치에 달했다. 그리하여 절이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사원전), 일반 백성들은 군역에서 면제 받고자 스님이 되는 편법도 많이 썼다. 따라서 유교를 국교로 세움으로써 불교의 세력을 막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유교를 선택 할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셋째는 불교의 횡포뿐 아니라 고려가 워낙에 국교로서 불교를 신봉하였기에 불교세력 역시 강성하여 스님이 궁궐에 상주하면서 정책에 간섭하기도 하였고, 그것은 왕권마저 흔들리게 하였으므로 왕권을 보호하고자 유교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유교는 부모에게 순종을, 나라에 충성함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이성계가 군사력으로 고려 왕조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다고는 하나 여전히 왕씨인 고려조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 백성의 머릿속에 각인 되어져있는 나라의 이름을 바꾸고, 새롭다는 것을 인식 시켜야 만이 통치가 가능 했을 것이고, 불교 역시 탄압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섯째는 사찰이나 스님들이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도 세금은 전혀 내지 않았고, 심지어 평민의 소유 토지마저도 절을 짓는다고 강제로 빼앗아 가니 민심은 혼탁했을 것이다. 또한 군역에 끌려가기 싫어 가짜 스님 행세를 하고 다니니 징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스님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니 국가 재정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유교를 국교로 세우니 군역에 충실하게 되고, 정부정책에 잘 따르니 농업을 장려하여 세수를 많이 확보하게 되니, 국가 재정이 좋아져 자연스럽게 왕권이 확립되어 유교를 선택하는데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마다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고 탄압하여 절과 스님들의 재산을 빼앗고 깊고 깊은 산속으로 내 몰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조선은 유교로부터 얻은 것은 무엇인가?
君臣有義 (군신유의)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어야 하고
父子有親 (부자유친)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이 있어야 하며
夫婦有別 (부부유별)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하며
長幼有序 (장유유서) 어른과 어린이는 차례가 있어야 하고
朋友有信 (붕우유신) 벗과 벗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유교의 전신인 오륜은 혼탁했던 민심을 안정시키고 스님의 재산을 압수하니 국가재정까지 확보 하게 되어 유교는 이씨조선의 해결사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유교의 정착으로 인한 국가의 충분한 재정이 확보 되고 국민의 호응을 얻게 되니 통치권을 자연스럽게 확립하여 500년의 세도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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