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정

생활문화 분류

생활문화복음화|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작성자 정보

  • 조성만 본부장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바로 알고 배워서 그 정체성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토속적인 샤머니즘을 미신으로 생각 할 것은 더욱더 아니라, 그 실체와 그 속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교의 사고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사고를 가져야만 한다. “남자가 그런 것을 해, 여자 이니까” 하는 말을 버릴 때가 되었다. 직업도 남녀 구분이 없다. 최전방을 지키는 소대장이 여성의 목소리로 바뀌어 휴전선을 지키고 있다. 남자가 가사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또한 노인환자 100만명 시대가 오다보니 가정에서 효라는 명분으로 감당하기는 힘들고 요양원으로 보내기는 불안하다. 결국 노인환자는 국가적 차원의 보호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와 같이 유교에서 목숨 걸고 지켜왔던 효의 문화도 변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시점이야 말로 하나님의 문화가 필요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건물 꼭대기에서 골목을 내려다보며 지키고 있는 십자가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한결같이 우리 곁에 서있다. 눈동자 안에 들어 있다. 복음을 전도지로 눈동자 속에 그려진다. 이제는 눈 속에서 나와 촉감으로 손안의 십자가로 은혜를 느껴보자 은혜를 만져 보아야 한다.

항상 윗사람의 명령만 듣다 보니,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니, 독창성이나 창의성은 온데간데없고 따라 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 이런 생각과 사고가 바로 유교의 잔재들이 아닌가? 이 굴레에서 벗어 나야한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면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당당하게 벗어나야 한다.
우리 곁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은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생활하면서, 갓 세상에 나온 따끈따끈한 제품과 도구들마저도 1년만 사용하면 싫증을 느껴 새 것을 요구하며 짜증을 낸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옛 것만 고집한다. 이것이 보수일까?

창세기 4장의 말씀에 아벨은 첫 새끼 첫 소산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기술 문명의 첫 소산은 인간만이 즐기는 것 같다. 관념적 권위의 정체성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공부를 하여 살아가는 실생활에 적용 한다. 성경공부를 했으면 실생활에 적용해야 하는데 적용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실제로 적용을 해놓고 그것마저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유교에서는 붉은색은 죽은 사람에게만 사용했던 색이다. 금기시 했던 색이였지만, 우리는 우체통이나 간판글씨로 신호등의 색으로 많이 사용한다. 이런 것은 보혈의 색으로 붉은색을 인식하기 때문에 많이 애용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 놓고 말씀으로 보지 못하고 전통으로 관념으로 보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씀 안에서 새 진리만 찾고 있다. 이런 것부터 바로 알아야 할 것 같다. 체계적인 이론적 학문으로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사회복지에 한국교회가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6장 말씀은 구제활동을 할 때 상대의 인격을 배려해서 되도록 조용히 하라는 뜻이지만, 선한 일을 널리 알려 확산시키라는 너희 빛을 사람에 비치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하라는 마태복음5장 말씀도 있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는 일을 널리 알려 파급효과를 얻고 교회들이 서로 배워 기독교의 문화로 일상생활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핵가족화가 되면서 가정의 자녀가 하나, 둘 밖에 안 되다 보니 공동체 의식은 교회에서 배우고 실천하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옛날에는 대가족 제도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 권위적인 사고 개념의 수직적인 구조로 문중과 가정을 다스렸지만 지금의 신세대는 수평적인 사고로 토론하고 의논하여 경영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서 왔다. 잠언19장에 의하면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회의를 잘하는 대기업 들은 성장하여 부를 누리고 있다. 토론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기술 역시 일분일초가 새롭게 발전하고 새 것을 내어 놓고 있다. 회의와 토론이 미진한 국회는 항상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언제 봐도 권위를 먼저 앞세운다. 의논을 못한다는 핑계와 명분을 당리당약이라고 둘러 된다. 한때는 우리의 한글마저 언문으로 격하하여 천시 했던 기득권층의 지식이 아니가, 다행이도 그들의 변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복음인 것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