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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증언들|전선에 서다(2) - D.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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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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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역경 속에서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진가도 평안할 때, 평화로울 때보다는 어려울 때 확실히 알아 볼 수 있다. 본회퍼 목사의 본질을 바로 알게 해준 시대는 어떠했는가. 그가 직면한 전선 중 하나가 교회의 정치화였다. 20세기 유럽 상황은 극우파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있었다. 정치는 이미 제국주의를 거치는 동안 점점 우파로 기울어가면서 국가 간 경쟁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그러한 경쟁이 만든 비극이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앞다투어 민족 복음화, 민족 구원을 기치로 내걸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민족주의 노선에 가담했다.

독일에서 기독교 민족주의는 어느 나라보다 강했다. 독일은 1차 대전에서 패전한 결과로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했고, 그 결과 경제가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으며,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민족을 염려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문제는 그 권력의 중심에 히틀러라는 독재자가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일명 나치당)은 독일을 비극에서 구해야 한다며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소련으로부터 밀려오는 공산주의 혁명을 막을 길은 히틀러 같은 막강한 카리스마의 정치인과 기독교 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여기에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이 동조했다. 심지어 나치 제복을 입고 교회에 들어오는 목사들도 있었고,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들을 나치당 행사에 내보내는 교역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치당이 주장하는 민족 사랑을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본회퍼는 교회가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나치가 주장하는 친기독교정책이 기만술, 회유책에 불과하다고 간파했다. 복음적이지 않은 정책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자리는 자연히 반나치 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어느 누구보다 독일 민족을 위한 열정을 가진 그였지만 또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감시당하고 비난을 당해야했다. 히틀러의 나치가 지배하던 1933-45년간 독일은 기독교가 그렇게 양분되었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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