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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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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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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언어문자는 마음이 실려 있어 부활한다. 시인 김소월의 시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다시 살아나서 시인 김소월과 같은 마음으로 이미지를 그리며 시 "진달래 꽃"을 읽거나 감동으로 외우고 사색에 잠기곤 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 돈을 많이 벌거나 세상을 호령했던 이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울러 그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한 아이가 자기 고조할아버지의 일기장을 읽고 고조할아버지를 머릿속에 그리며 상황을 상상한다. 아이는 고조할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의 돈보다는 고조할아버지의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 뭉클해진 가슴으로 마음속 깊이 그 뜻을 새기고 다짐 한다. 이것이 글의 힘이요 문학의 부활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큰 선물이자. 함께하시는 동행이다. 이것이야 말로 꼭 복음화 해야 할 과제요 숙제인 것이다.

문학의 시 언어에는 감정을 담고 나아가서는 영혼을 실어 놓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감정으로 느낄 수가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글로 표현 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읽고 공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만의 생각으로 간직하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굳이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처음에는 기쁘게 감동으로 받아 마음속 깊이 담아 두었다가 먹고 사는 것에 쫓기다 보니 쉽게 잃어버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반복되는 은혜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는 것이 우리들의 욕심이기도 하다. 그 교만이 자라나서 나중에는 받은 은혜를 돈에 비교하고, 세상 권력에, 숫자에 비교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하찮게 생각하고 아주 작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러니 글로 시어로 옮기기는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그냥 버리게 되고 심하게 여기면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이 받은 은혜만 크게 보이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니 그와 같은 은혜를 받으려고 아니, 그것보다는 더 큰 것을 받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탐욕을 부리며 애를 쓰고 매달려 보지만 결과는 소유하지도 받지도 못하고 내가 받은 것 마저 다 잃어버리고 허탈감에 사로잡혀 원망과 탓만 늘어놓게 된다. 심하면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인지도 모르는 지경까지 도달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왜 그럴까 욕심만을 앞세웠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주변에서 큰 것만 많이 보다보니 작은 것은 무시하는 경향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환경에도 기인한다. 급커브의 경제 성장을 하다 보니 빨라서 좋고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이제는 잃은 것을 하나하나 챙기고 갖출 때인 것 같다. 성경에도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의 말씀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갈래의 뜻이 존재하는 것 같다. 첫째는 한 생명이 소중한 동료들과 같이 동행을 못하기 때문에 찾는 것이고, 둘째는 재산의 이유로 즉 손해를 보기 때문에 찾는 경우 같다. 오늘날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맘몬주의를 두고 하신 말씀 같기도 하다.

한편 우리말에는 천재(天才)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하늘의 재주를 닮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럼 하늘의 재주는 무엇일까, 없음(無)에서 있음(有)을 만들어 내는 창조이다. 그러니까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는 말이다. 암기력이 좋아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천재가 아니라 수재(秀才)라고 한다. 수재는 이미 나와 있는 단어나 법조문을 잘 외워서 좋은 대학도 가고 변호사가 된다. 그런데 천재는 99% 노력과 1%의 영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다. 99%의 노력은 인간이 세상에서 하는 것이고 1%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1%로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천재가 될 수 없다. 1%로는 영원한 예술의 생명이며 본질이다.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만 없음에서 있음이 되었다는 창작이란 이름을 붙인다. 시인을 수필가를, 하나님의 자녀를 천재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나 번제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헤아리라는 뜻 같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지식을 앞세워 비교하는 잣대의 진리를 버리고 오직 말씀으로 살고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은 아주 작디작은 은혜라도 소중하고 존귀하게 생각하여 감동의 글로 시 언어로 옮겨서 간증을 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하는 크리스천들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을까? 아무리 좋은 영상기기나 정보매체가 있어도 그것을 통해서 전해야 하는 말씀의 메시지가 감동적인 언어 형식인 문학적인 구성과 표현을 얻지 못할 때 이 치열한 세속문화 콘텐츠와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문학을 복음화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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