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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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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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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도시를 가다(8)

- 아우그스부르크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수많은 신학자들, 신학생들, 정치가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는 반대파도 있었지만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들도 있었다. 루터의 생각은 이제 하나의 굳건한 사상으로 형성되어갔다. 아주 작은 밀알이 동토를 뚫고 나오는 것같이, 아주 보잘 것없는 불씨가 산야를 태울 기세로 불타오르듯 했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일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소요에 불과하다고 여겼는데,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독일 전역으로, 유럽 곳곳으로 종교개혁 사상은 문서를 타고, 개혁가들의 입소문으로, 수많은 순례자들을 통해 요원(遙遠)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정치 상황 또한 구교의 편이 아니었다. 루터는 가톨릭으로부터 이단, 교회 권위와 통치권 훼손, 교황 절대권에 대한 불복종 등으로 파문 위협을 받았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압송해 보내라는 교황의 명령을 거절했다.
교황청은 마침내 1518년 10월 카예탄(Cajetan) 추기경을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로 파견했다. 칼 5세의 신성로마제국은 이 도시에서 제국의회로 모였다. 독일 남단에 있는 이 도시는 알프스의 고봉이 작은 산처럼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생애와 연관이 있다. 예수님 탄생 전 황제 아구스도가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영토거주민은 호적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눅 2:1, Caesar Augustus). 로마군이 북진하면서 주둔한 곳에 황제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카예탄은 교황청이 내세우는 대표적 신학자였다. 그는 교황무오설과 함께 “교회의 공회의(Council)는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루터를 설득하려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루터는 이미 성경의 가르침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렇게 주장했다. “교회도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는 교회가 저지른 명백한 오류를 부정할 수 없다. 교황의 절대권은 왜곡되었고, 돈벌이와 허영심을 채우는데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1520년에 쓴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루터의 판단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교회가 포로로 잡혀 있다는 내용의 글을 쓰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스러운 언약이 불경건한 사람들의 견해와 전통들로 말미암아 이득을 추구하는 불경스러운 탐욕에 이바지하도록 강제적으로 변질되어 왔기 때문이다.”(J.딜렌버거 편, 『루터저작선』,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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