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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決算)의 정도가 곧 영성(靈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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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決算)의 정도가 곧 영성(靈性)이다”

마13:1-8 배익환 목사(연수구기독교연합회)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라는 뜻입니다. 이 영성은 말씀을 듣는 자세나 그 말씀에 반응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1.말씀이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자기 자신을 폐허(廢墟)로 만든 상태가 바로 길가입니다. 두 종류의 탕자(蕩子)가 있습니다. 1)예수 없이 교회 밖에서 사는 타락한 탕자가 있고(가나안 교인), 2)예수를 믿으면서도 성령의 감동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있어도 전혀 그에 반응을 하지 않는 탕자가 있습니다.(돌아 온 탕자의 비유)

 

그래서 어떤 씨가 떨어져도 그 지독한 이기심 때문에 결실하지 못합니다. 아주 완고(頑固)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 이전의 이 완고한 아담의 자아(自我)가 여전히 깨지지 않은 사람은 의외로 많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 마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십니다. 주님께서 그 구속(救贖)의 씨앗을 떨어트려 주셨는데..., 이 생명(生命)이 도무지 밖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2.돌밭에 떨어졌습니다.

본능적(本能的)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뜻합니다. 기쁨과 분노의 감정적 표현을 잘 합니다. 말씀을 받되 그것은 잠간일 뿐 금방 잊어버립니다. 마음의 감동은 잠간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을 만나면 푹 주저앉습니다.

라헬도 레아도 자식을 얻으면 각자가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서로 남편 뺏기 경쟁을 하는 것같이 했지만 궁극적 기쁨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 그 자체가 본질적 기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속(救贖)의 기쁨이 모든 기쁨의 원천(源泉)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삶의 어떤 변동이 조금 있었다고 해서 그 섭섭함 때문에 나의 헌금은 뭐야? 십일조는 뭐야? 새벽기도는 뭐야? 주일을 지킨 것은 뭐야? 내 감사는 뭐야? 이렇게 막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지 말고 다시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삶으로 자신의 삶을 안정시키고, 평정해야 합니다. 십자가 구속의 능력을 화끈하게 붙들고 나는 아니야! 일어날 수 있어! 오늘은 내가 비록 죄인이지만 내일은 의인으로 살 거야! 하며 본래적 감성(感性)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곤란 해 집니다.

 

3.가시넝쿨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성(知性)과 지식(知識)으로만 받습니다. 감동과 깨달음이 있었다는 기쁨의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까? 솔로몬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까?

그런데 그대로였습니다.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울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그들의 내면(內面)에 형성되지 못했고 하나님의 마음이나 의지(意志)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반드시 인격변화를 줍니다. 회개(悔改)는 반드시 흔적(痕迹)이 남습니다. 이것이 인격변화입니다. 진리(眞理)는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무모한 눈물이나 감동이나 감화만 남기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천적 삶의 흔적이 있습니다. 수천 번의 감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형상화(形象化)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우리가 믿으면서도 여전히 이런 부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4.옥토(沃土)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경작할 수 있는 마음이나 영(靈)의 상태를 뜻합니다. 30배 60배 100배를 소출할 수 있는 밭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순수 속성(屬性)은 “거룩”입니다. 성령(聖靈)은 오직 성도의 심령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옥토(沃土)는 성령께서 거니시는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거룩”의 유전자(遺傳子)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옥토(沃土)로 만들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보혜사 성령을 다시 보내셨습니다. 이 옥토(沃土)를 은사로 주시기 위해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보혈, 그 피 값은 이 옥토(沃土)에만 사실적으로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앞의 다른 밭은 결산할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리(敎理)를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미혹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결산할 것이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영성(靈性)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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