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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해자의 말로(末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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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장자옥 목사

 

대박해자의 말로(末路)

 

크로아티아는 발칸반도 북부지역 아드리아 해를 안고 있는 유럽연합국가로서 인구 4,313천명이며 1991년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했다. 종교는 카톨릭이 87.8%로 절대 우위를 이루고 나머지는 정교회 4.4%, 이슬람 1.3%, 개신교는 극히 미약하다

크로아티아는 동유럽의 진주라고 할 만큼 아름답고 유적지도 많다. 그 중에서 크리스천이라면 남부지방 아드리아 해를 품은 항구도시 스플릿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스플릿(split)은 인구 22만이지만 수도 자그레브 다음 가는 역사 깊은 도시이다. 기원전에는 그리스인들이 거주했고 그 후에도 마에 예속되었다. 우리 크리스천이 스플릿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기독교 대박해자인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퇴임 후 이곳 해변에 거주할 궁전을 건축하고 살았다는 점에 있다.

1. 그의 등극과 기독교 박해

그의 본 이름은 디오클레스인데 그는 이곳 스플릿 하층민 출신으로 군대에서 승승장구하여 전임황제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이 되었다. A.D 284년 황제가 암살되자 휘하군단이 그를 황제도 옹립하였으며 이름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했다. 그는 3세기 20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혼란을 극복 수습하고 외부의 적을 격퇴하며 권력을 강화하여 통치권을 확립했다. 방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4두 정치를 창안하고 여러 가지 개혁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아보려 애썼다. 재정을 위해 증세하고 물가안정을 위해 인류 최초로 가격통제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원로원을 마비시키고 황제 독단으로 통치하며 강력한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이런 그의 정치 행

태는 결국 기독교를 가장 강력하게 박해하도록 만들었다. A.D 303년 기독교 탄압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고 교회와 성물을 파괴하고 집회를 불허했다. 당시 기독교가 입성했던 로마에서는 저항하고 봉기가 일어났으나 그는 군대를 보내 제압했다. 사제와 주교를 투옥하고 304년에는 ‘모든 로마인은 로마의 신을 숭배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이를 어기면 강제 노역이나 사형에 처했다. 이로써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배교도 많았다. 이 대 박해는 309년까지 25년간 계속 되었다.

2. 그의 최후

그는 295~305년 10년 동안 스플릿에 자기가 거처할 궁전을 지었다. 궁전은 4각 성곽으로 감싸고 있는데 그 중 서쪽은 해변을 끼고 입출이 용이하게 했다. 궁전에는 그의 사병과 시녀들이 거처할 지역과 자신이 거처할 안채와 그의 무덤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궁전에 거한지 8년만인 313년 향년 66세로 명예롭지 못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17년 후 그의 무덤은 도굴되고 파괴되었다. 그는 313년 그의 후계자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란 칙령으로 기독교에 자유를 부여한 그 해에 회한의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3. 그의 가족들

그가 퇴위한 뒤 서로마 황제 막시미누스가 그의 아내 프리스카와 외동딸 발레리아를 납치했고, 이를 항의하자 부녀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해 버렸다. 그 후 부녀는 막시미누스의 정적 리키니우스에게 선처해 달라고 갔으나 오히려 리키니우스는 군사들을 보내 이 부녀를 데살로니카에서 살해해 버렸다.

결론: 이방인 출신으로 로마황제까지 출세했으나 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기는커녕 기독교를 가장 악랄하게 박해했던 디오클레티안. 제위 24년간이나 기독교를 극악하게 핍박했던 그도 자신이 죽던 해에 맞추어 기독교가 자유를 얻을 줄 알았는지.. 더구나 후임자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상상이나 했을까? 그의 웅장했던 무덤자리에 그가 그렇게 박멸하려고 했던 기독교 예배당이 세워졌고 그의 아내와 외동딸이 그렇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을 줄 그뿐 아니라 누구도 예견이나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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