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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의 최후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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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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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의 최후를 바라보며

 

논쟁적인 작가 마광수(66세) 전 연세대교수가 5일 자택에서 자살로 죽음의 강을 건넜다. 친필유서에는 “내 시신처리와 재산은 누나에게 맡긴다.”고 쓰여 있었다.

마 교수는 1951년 서울에서 출생, 연세대를 나와 1977년 월간 문학으로 등단 1979년 시인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어 약관 28세에 홍대 조교수가 되었고 1984년 모교 연세대국문과 조교수로 임용 되었다.

1985년 결혼 5년 후 이혼하고 자녀도 없이 줄곧 홀로 살았다. 그는 문학적 영감으로 순국청년 윤동주를 연구한 학구적인 로맨티스트였으나 짧은 결혼과 이혼 이후부터 퇴폐적 마성에 사로 잡혀서 성담론(性談論)을 내세우며 세간을 뒤흔들다 지성인답지 않게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나는 마 교수의 굴곡진 인생과 그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첫째 한 인간이 두 가지 명성을 다 거머쥘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목도했다. 30초반에 일류대학 국문학 교수라면 대단한 명예를 얻은 것이다. 게다가 문학성이 뛰어나 시, 수필, 소설을 통하여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교수와 작가라는 양자를 거머쥐면서 그 명성을 지켜나가지 못했다. 그는 1992년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로 인해 외설 작가로 구속 수감되면서 교수자리에서 면직이 되는 수모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차라리 전업 작가가 되었더라면 비판과 면책이 덜했을지 모른다. 당시 서울대 손봉호 교수는 신문에서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유행한다.” 고 까지 비판을 할 정도였다. 그는 “본성에 솔직한 사고(思考)만이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변혁할 수 있다”고 언성을 높였으나 교수나 지성인이라면 본성보다는 본연의 사명에 더 헌신하고 당위성에 따라 언행을 삼가 해야만 했을 것이다.

둘째, 그는 그토록 빛나는 명성에 걸맞게 자유분방하게 살았으나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휘말리고 해직과 복직 그리고 정년퇴임 이후에는 우울증이 악화되어 그것이 그의 삶을 재촉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명예교수가 될 수 없었다. 교수 세계는 물론 문단에서도 왕따를 당해야 했다. 개인적으로 어디서든 강의를 하고 싶지만 기회가 생기지 않았고 퇴임 후에는 대부분 집에만 머물렀고 “학교와 학생들로부터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해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셋째 그는 인간을 성적욕구와 본능을 가진 존재이면서 단지 윤리와 규범과 도덕의 굴레로 포장하여 위선을 떨고 있는 위선자들로 규정하면서 자신은 그런 인간의 이중성을 파괴하기위해 기존 질서에 충격을 주며 그 위선의 껍질을 벗겨버리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천명하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여 그렇게 살라고 외치는데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 하면서 시대의 반항아로서 자신을 정죄하고 이해해주지 않는 기성세대를 비웃으며 더욱 튀는 행동을 일삼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이미 아웃사이더가 되어 홀로 고독하였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내 인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며 최근 ‘가슴의 통증을 호소했다’ 고 한다.

그러나 늘상 자기신변에서 성적담론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살 수 없었던 그였지만 끝내 더 자존감을 지키지 못하고 짧은 유서를 남기고 신분과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최후를 마치고 만 것이다. 그의 뛰어난 재능, 그리고 통제 받지 못한 일탈이 결국 그의 지성과 명성을 서서히 파괴시켜버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근자에 써온 글들도 다 부질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계속 집필했고 이 달 중에 단편, 21편을 묶은 유작 소설집 ‘추억마저 잊으랴’가 출간 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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