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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표적,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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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31

 

여섯째 표적,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다

요9:1-7

 

영적인 맹인들을 피해 성전을 빠져나온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육적인 맹인 한 사람을 만나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 8장을 ‘어두움’이라는 단어로 해석한다면 9장은 ‘빛’이라는 단어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9장이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8장 12절의 주석과도 같은 삽화이기 때문이다. 모리스(Morris)는 “4복음서에 예수님의 치유 중 눈 먼 자의 치유 기사가 가장 많다(마9:27-31, 12:22이하,15:30-31, 21:14; 막8:22-26, 10:46-52, 눅7:21)며 이 이적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일이었고(출4:11; 시146:8), 메시야의 행위였기에(사29:18, 35:5, 42:7) 예수님의 이 이적은 하나님의 행위이자 신적 메시야의 성취였다”고 했다.

9장의 맹인은 나이는 알 수 없지만 태어날 때부터 장애(1절)가 있었던 성인, 기나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앞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늘 남의 신세만 지고 구걸하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불편하게 함으로써 항상 멸시, 천대를 당하며 살았다. 그러나 5장에서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던 38년 된 병자와는 사뭇 다르다. 기록자 요한은 9장에서 그의 신앙고백이 점점 더 밝은 빛을 향하고 있는 발전적인 모습이었음을 강조했다.

제자들이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2절) 묻는 질문을 보면 그들도 인과응보(因果應報) 식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원인과 결과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태도였다. 물론 성경도 응보의 법칙을 가르치지만 그게 고통을 푸는 마스터키는 아니다. 그들은 잘못된 것은 모두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편견이다. 이는 당시 유대사회가 모든 장애나 질병을 죄의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에 상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며 책임전가나 하는 것은 맹인과 다를 바 없다.

제자들은 그저 정죄하고 논쟁대상으로만 삼았지만 예수님은 논쟁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God might be displayed in his life). 예수님은 8장에서처럼 그들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이끄셨다. 물론 이 대답도 충격적이었다. God’s purpose behind your pain. 하나님의 목적으로 인한 고통?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맹인으로 살았다고? 개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한 처사 아닌가. 하지만 죄책감 갖고 무겁게 산 것 보다는 차라리 복음이었다. 장애 때문에 성전에 입장할 수조차 없었던 그 동안의 서러움을 잊기에 충분한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말씀이든 순종할 준비가 됐다.

그래서 특이하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황당한 말씀과 원시적인 방법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방법보다 중요한 것이 능력이니까. 아니, 정죄하고 매섭게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의사처럼 진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발라주시는 주님의 손길은 오히려 따뜻했으니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이라는 명칭은 원래 수로(水路)를 거쳐 이 못으로 물을 보낸다는 의미,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보냄을 받는다는 사상이 자주 나오는 것과 연관된 표현으로 보면 될 것이다.

결국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came home seeing) 간결하다. 드디어 눈을 떴다! 민간요법에 쓰이는 침의 능력? 아님 진흙? 아니다.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고쳐주신 것이다. Halleluj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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