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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 바울의 심정으로 터키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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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자옥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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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는 터키는 히타이트에서 로마 비잔틴 제국(동로마) 오스만 대제국과 1923년 터키 공화국에 이르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거쳐 간 곳이다. 요한과 바울사도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번영과 고난의 흔적이 남아있어 많은 성지 순례 객이 찾아오지만 오스만 제국이후 터키는 99%가 이슬람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 한국 독립이 참전으로 인연을 맺어 한국인을 코렐리(koreli) 형제의 나라라고 우호 감을 갖고 대해주지만 기독교 목사의 입장에서 터키 땅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고 무겁기만 하다. 터키는 한반도의 3.5배나 되고 인구는 약 7천만 명 에다 자원이 풍부하며 넉넉한 국토는 밀과 농산물을 지천으로 쏟아낸다. 사도바울의 피와 땀과 눈물의 기도가 굽이 이렇게 무슬림의 바다를 이루고 말았을까?

역사란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고 문명의 흥망성쇠가 종교의 운명도 바꿀 수 있겠지만 무엇이든 지키지 못하면 짓밟히고 잃게 마련인 것이다. 터키인은 기원전 2천 년경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 하였다. 중국 고전에는 훈족이라 했는데 터키 역사가 기독교와 만나게 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후 특히 바울사도의 헌신적 선교를 통해서였다. 바울 순교 이후 기독교는 전 로마제국에서 250여 년에 걸쳐 핍박을 받게 되었으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란 칙령을 발표하여 자유를 얻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0년 로마를 통일하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 망하나 동로마(비잔틴 제국) 제국은 537년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최 전성을 맞는다. 그러나 600년경 이슬람의 사라센이 로마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717년 이슬람은 콘스탄티노플을 셀주크와 오스만 튀르크가 1922년까지 지배하다가 무스타파 케말 장군에 의해 1923년 터키 공화국이 탄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스타 케말은 1923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서구를 모델로 터키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대 개혁을 단행하고 이슬람 사회의 폐쇄된 인습으로 부터 과감한 해방을 추구하였다. 그는 정교 분리를 헌법으로 철저히 보장하였으며 일부다처제 폐지, 이슬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 아라비아 문자 대신 로마자 사용, 남성의 페스(화분형 문자), 여성의 페체(얼굴 가리는 베일) 착용을 금지하였다.

실제로 터키의 99%가 이슬람이라 하지만 국가기관이나 학교 공공기관에서 무슬림을 나타내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물론 희잡(검은 천으로 온 몸을 휘감은)을 입는 여성도 없고 반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두드러져 공공기관, 은행 등 높은 지위에 오른 여성비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 케말에 의해 근대화에 성공한 터키는 1952년 나토에 가입했고, 친 서구 평화외교를 추진하면서 토, 일요일을 공휴일로 쉬고, 공업 진흥을 꾀하고 있다. 서구의 기독교 젊은이들도 예외는 아니지만 터키의 젊은이들도 무슬림 예배에 대부분 참여하지 않고 있다. 술도 판매하고, 배꼽춤과 축구가 그들을 열광 시킨다.

이러한 터키를 두고 아랍인이나 파키스탄인들 은 터키인은 무슬림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아직도 터키에는 67,000개의 자미(모스크)가 있으며 시골 산간 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신흥 주택 단지에 지어진 자미의 경우 신자가 적어 유지 자체가 곤란해져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이슬람 속의 서구화를 지향하는 터키는 이런 추세로 가속도가 붙으면 머지않은 날(?) 종교적으로도 개방되고 선교사들이 다시 그 땅에 몰려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바울의 헌신적 선교가 다시 한 번 꽃을 피울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09. 7. 16 이스탄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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