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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모독(神聖冒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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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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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38

 

 

 

신성모독(神聖冒瀆)?

 

요10:31-42

 

드디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자신들이 바라던 대답을 들은 유대인들은 흥분하여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극단의 행동으로 반응했다(31절). 아예 현장에서의 즉결 재판으로 밀고 가려는 태도였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투석(投石)하려는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도 도망은커녕 일체의 다른 반사행위 없이 담담한 자세로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선한 일이 아니라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신성모독’ 때문”(33절)이라며 합법적인 절차도 없이 재판과 극형 집행을 동시에 하려 했다.

 

그들이 실제로 당국이 필요한 어떤 조치를 취하게 하는 고소 절차를 밟지는 않았다. 다행히 실제로 투석도 하지 않았지만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레24:16)라는 율법만 생각했고,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고정된 신학에만 묶여 그저 외골수들의 편협한 태도만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시 82편 6절의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는 말씀에 기초한 변증으로 그들의 과격한 행동에 차분히 대응하셨다(34-38). 아삽의 시(詩)인 시 82편은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재판관들을 모아 그들도 어느 날엔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는 재판정의 모습에 관한 내용으로 여기서 ‘너희’는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임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神)이라고 불렸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위임받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마저도 신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나의 주장이 왜 신성모독이냐, 나는 오히려 정당하다”는 철저한 논리로 맞서신 것이다.

 

이는 “율법을 떠받들고 있는 자들로 자임하면서 이것도 모르느냐”하는 식의 도전이었다. “율법에 기록되지 않았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는 것 아느냐”(34-35절). 예수님은 그들의 관심을 성경으로 돌리게 하셨다. ‘율법’은 엄격히 말하면 모세오경이지만 때때로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됐으며 예수님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셨기에 여기서는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주장하신 것 중 단 하나라도 철회하거나 자신의 주장에 대한 유감 표명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이라도 주시하여 보라”며 그들의 공격을 받아 넘기셨다. 일만 보아도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 것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가장 거룩하다는 자부심으로 사는 예루살렘 유대인들,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큰소리치던 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잡으려고만 하자(39절) 예수님은 결국 그들의 적개심을 피해 요단강 건너편 베뢰아, 요한이 처음으로 침례 베풀던 곳으로 가셨다(40절). 추후 전개될 ‘십자가’라는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였던 셈이다. 더욱이 그곳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곳이고, 그곳 사람들은 침례요한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침례요한이 예수님처럼 자신의 증거를 뒷받침해 줄 만한 기적들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최소한 침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 것들이 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루살렘 사람들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다(42절). 환영 받을 곳에서는 투석의 위험을 당했지만 그곳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선풍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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