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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위한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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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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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42

 

예수님을 위한 잔치

요12:1-11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 주일로 독자들을 인도하며 예수님의 공중 앞에서의 사역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 하고 있다(1절). 그 마지막 공적 사역은 임팩트가 아주 강한 한 사건이었다. 요한은 동일한 사건을 다룬 마태복음(26:6-13)과 마가복음(14:3-9)의 기록과는 다른 몇 가지를 독특하게 기록했다. 그 중 두 복음서에서 ‘식사’라고 표현한 부분을 ‘잔치’(2절), 그것도 ‘예수를 위한 잔치’라고 표현한 것은 차원이 다른 표현이라 할 만하다. ‘나사로를 위한 잔치’도 아니고, ‘문둥병자 시몬을 위한 잔치’도 아니다. 그냥 식사하는 것과 잔치하는 것은 느낌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잔치는 그냥 한 끼 떼울수도 있는 식사와 달리 준비를 잘 해야만 한다. 흥겨움도 다르고 여운도 다르다. 요한이 똑 같은 사건을 ‘예수님을 위한 잔치’로 표현한 것은 절기를 들어 시간을 점찍는 방법으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6장까지는 유월절, 7-9장은 초막절, 지금은 다시 유월절이 중심 또는 배경이다. 이렇게 명절을 중심의 기록이라면 ‘잔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또 늘 잔치하는 인생이었던 요한의 생활방식에서 나온 표현일 수도 있다. 어떤 라이프 스타일이냐에 따라 사건 기록 방향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다른 두 복음서에서는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이라고 했지만 요한은 “베다니,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한 것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두 복음서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등장,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그저 ‘한 여자’라고만 표현한 그 여자가 마리아라고 요한은 그 이름을 밝혔다. 집 주인인 문둥병자 시몬의 이름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3남매를 부각시킨 듯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사역 때마다 이 베다니의 3남매를 특별히 사랑하셨음을 반복적으로 밝혔다. ‘본래부터의 사랑’(11:5)이었고, ‘유대인들이 다 알 정도의 사랑’(11:36)이었다고 했다. 갑자기 마리아가 예수님께 기름을 부어드리면서 잔치집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여기서도 기록에 차이가 있다. 마태와 마가는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고 했고, 요한은 발에 부었다고 했다. 아마 머리에 부은 기름이 발까지 흘러내렸을 수 있고, 따로 부었을 수도 있다. J.R.힐은 “기자들이 각기 감동받은 대로 기록했을 것”이라고 했다. 마리아의 특별환대요 특별사랑이었다. 가룟유다에 의하면 3백 데나리온 정도의 가치 있는 지극히 비싸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다 쏟아 부은 것,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이 깜짝 이벤트에 엄청 당황했던 것 같다.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했고, 요한은 가룟유다가 낭비라고 펄쩍 뛴 것으로 묘사했다. 과연 낭비였을까?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10만원씩 잡으면 3천만 원, 당시 처녀의 결혼지참금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마리아는 전 재산 같은 기름을 다 드릴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다. 단순한 깜짝 이벤트가 아니라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사랑의 고백이며 자발적 헌신이었다. 사랑에 낭비가 없다면 그게 사랑인가? 유다의 계산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다. 요한은 유다를 가난한 자를 위하기는커녕 ‘도적’이라 표현했다. 예수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마26:10),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26:13)라며 마리아를 극찬하셨다. 결국 요한은 마리아의 헌신을 그녀의 돌발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잔치의 하이라이트로 다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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