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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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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

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5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14:1-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는 자기들 중에서 하나가 예수님을 팔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예수님은 자기들이 갈 수도 없는 길을 가신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말씀으로 멘붕 상태(mental collapsing)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위로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희망도 꿈도 다 사라지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 아마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몇 시간 후면 더 불안해 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Trust in God; trust also in me.)고 하셨다. 여기서 사용하신 ‘믿으니’와 ‘믿으라’라는 두 헬라어 동사 피스튜에테(Πιστεύετε)는 명령법으로 보는가, 아니면 직설법으로 보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직설법으로 해석할 경우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고, 명령법으로 해석할 경우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면’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모리스는 명령법으로의 해석이 적합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고 했다.

요한은 여기서도 특유의 한 가지 이상의 의미 표현을 시도했다. 예수님의 당부를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믿고, 동시에 제자들 앞에 있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중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핵심제자(재정담당)에게 배반당하고, 수제자에게 세 번이나 부인당하며,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잡혀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쉬운 일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믿으라고 하신 예수님은 당신이 가는 곳은 ‘아버지 집’이며 그곳에는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할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2절). 그 ‘거할 곳’을 모리스는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계단이라기보다는 영원한 거주지(居住地)”라고 했다. 결코 여행 중 잠시 거처 가는 처소나 일시적인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며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고도 하셨다. 기약 없는 이별도 아니고 ‘너희를 위한’ 이별임을 강조한 위로요,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충설명이다.

그러나 도마는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당황했던 것 같다. 도마만 그랬을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13:33, 36)는 말씀과 상충되기에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라는 그의 질문은 오히려 정직하고 합리적인 의심이었을 수 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6절)며 좀 새로운 말씀을 하셨다. 이제 곧 아버지께 가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가는 길을 ‘I am’(나는 …이다) 형식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4절, 5절, 6절에서 연속 ‘길’이 반복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길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길(the way)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길이라는 말씀이다. 이어서 자신은 구원의 의미를 지니는 ‘진리’(the truth)이며 ‘생명’(the life)이라고 하셨다. 생명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씀이다.

곧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이 “나는 길이다.”라고 하셨고, 악한 이들의 거짓이 통쾌한 승리를 즐기려는 때에 “나는 진리다.”라고 하셨으며, 몇 시간 후에 시신(屍身)이 되어 무덤 속에 잠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이어서 자신을 알고 따라 나섰던 제자들이었지만 아직 자신도 하나님도 잘 알지 못하는 중간단계에 불과함을 아신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이라며, ‘나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 즉,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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